-- 시행 후 50년이 지난 오늘 --
고등학교의 평준화 정책은 그 실시 직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동안 심심치 않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때로는 ‘하향식 평준화’니 ‘평준화 망국’이니 하는 표현을 할 정도로 전면적 부정의 어조를 띤 것도 있었고, 때로는 기본적 틀은 유지하되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온건한 태도를 보인 것도 있었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

-- 시행 후 50년이 지난 오늘 --

고교 평준화 정책을 다시 본다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이돈희 교수
​이돈희 교수

 

고교 평준화 정책의 발상적 동기

어떤 정책이 발효된 이래 장기간 지속적으로 교육적 논쟁거리가 된 것으로는 아마도 이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교육학도라는 이유로 흔히 언론기관으로부터 받는 질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바로 고등학교 평준화에 관한 의견이다. 2000년대 초기에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의 교장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더욱 빈번하게 그런 질문을 받아 왔다.

민사고 부임 직후에 춘천에서 언론사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가장 먼저 나온 질문도 또한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는 춘천에서 고등학교의 평준화를 두고 의견이 엇갈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아마도 내가 맡게 된 민사고가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자사고)에 속하므로 그 학교는 평준화 정책의 일부를 수정하는 탈평준화 제도의 하나라고 여긴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고등학교의 평준화 정책은 그 실시 직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동안 심심치 않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때로는 ‘하향식 평준화’니 ‘평준화 망국’이니 하는 표현을 할 정도로 전면적 부정의 어조를 띤 것도 있었고, 때로는 기본적 틀은 유지하되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온건한 태도를 보인 것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그 동안의 평준화 정책으로 인하여 많은 긍정적 변화를 가져 온 것도 사실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아이러닉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저항하였거나 그의 치적에 대하여 부정적 평가를 하는 급진주의적 ‘운동권’과 진보적-평등주의적 성향이 강한 집단도 고교 평준화 정책에 만큼은 호의적 반응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그들은 평준화에 역행하는 정책에 대하여 거부적 반응을 보여 왔다. 평준화 정책이 어떤 의미에서 평등주의적 요구를 기본적으로 충족시킨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사실상 평준화 정책은 입안 당시에 우리나라의 중등교육과 초등교육이 처해있었던 위기에 대한 처방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1972년에 고교 입시제도의 개선을 위하여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입시제도연구협의회’가 당시의 교육문제를 이렇게 진단한 바 있다.(윤정일 외, 「한국의 교육정책」)

즉, 교육적 측면에서 볼 때, 입시준비를 위한 과중한 학습부담은 학생들의 신체적 성장과 정신적 발달을 위축시켰고, 합격에 대한 강박관념은 극도의 정서적 불안을 조성하였으며, 입시위주의 교과목 편성으로 인하여 파행적인 교육과정의 운영과 암기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일관하였고, 지나친 경쟁의식은 이기적인 교육풍토를 조성하였으며, 지역간-학교간 교육수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과중한 과외 교습비의 지출로 가정과 국가의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일류학교에 대한 학부모의 집착은 치맛바람과 입시파동 등의 사회문제를 야기했으며, 과외교습의 성행으로 학교교육의 공신력이 실추되었고, 파행적인 학교 밖의 입시준비기관이 발호하게 되었으며, 출신학교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풍조가 만연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진단은 오늘날 우리가 대학입시에 시달리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두고 생각해 볼 수 있는 풍토와 거의 일치한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그러한 교육적-사회적 문제가 지금의 고교생들보다는 훨씬 어린 중학생들에게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중학교 평준화 이전에는 초등학교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그러한 가혹한 경험을 하도록 하였다.

지금도 그러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여 고등학교의 학생들로 하여금 아직도 ‘입시지옥’이라고까지 말하는 풍토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학생과 중학교나마 그러한 극악한 상태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더없이 다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다시 평준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가는 불을 보듯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즉 애초의 고교 평준화 정책은 합리적으로 여론을 확인하고 여건을 조성하여 시행한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소유했던 절대적인 힘의 행사를 통하여 강행한 것이었다. 그 결과 사실상으로 중등사학의 말살을 초래하였고, 물리적 여건과 교육적 환경에 있어서 학교 간에 명백한 격차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학교의 선택권을 박탈한 독재성 정책이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이질적인 집단을 위한 적절한 프로그램의 개발도 없이 모든 고교생들에게 획일적인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국가의 경쟁력을 주도할 인재의 체계적인 생산력을 거세해 버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결국 ‘하향평준화’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기억컨대, 내가 춘천의 언론사 기자들에게 한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공공재원으로 운영하는 공립학교에 1류 학교가 있고 2류, 3류 학교가 있다는 것은 좋은 제도라고 하기가 어렵고, 그런 점에서 공립학교는 평준화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립학교는 원칙적으로 평준화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하고, 국가가 어떤 부문의 인력을 양성 혹은 충원하기 위하여 특별한 학교를 예외적으로 세울 수는 있도록 허용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특별한 학교란 현재의 특수목적 고등학교가 그것에 해당하고, 사립학교는 적어도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학교를 의미하므로 자율형(혹은 자립형) 사립학교가 그것이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특수인력을 양성 혹은 충원하기 위한 규모가 얼마나 되며, 사립학교의 재정자립도를 어느 수준으로 볼 것인가는 국가적 사정을 감안하여 정책적으로 결정될 문제이다.

사립학교라고 하더라도 건학이념이 충실하고 탁월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자 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공공재원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면 평준화의 대상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이 있고 건학이념의 충실한 실현을 위하여 자율성의 확보를 원한다면, 그런 사립학교는 평준화의 범주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그 후에 나는 평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축을 이룬 어떤 대회에 초청이 거부된 일이 있었다. 내가 말한 내용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평준화를 전적으로 지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내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어쩌면 현재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제도에서 혜택을 누린 집단에 속하였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50년 이상의 긴 세월을 지나면서 이미 그러한 심각한 사태를 모두 망각하였거나, 아니면 오늘의 우리가 바라는 바인 인재개발의 효율성에 지나치게 집착해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우악스러운 힘으로 시행한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평준화 상태의 교육이 지닌 문제들만을 보고 그 폐지를 서둘러 주장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정의의 측면에서나 효율성의 측면에서 볼 때, 현실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평준화에 의해서 성취한 성과들만을 보고 원형 그대로 존치시킬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할 것도 아니다. 교육제도의 운영은 한 가지 혹은 몇 가지의 효율성만을 두고 평가할 수는 없다. 효율성이란 학교교육이 지닌 다변적인 목적의 체제에 비추어 필요악이 최소화된 상태라고 판단될 수 있을 때 그 본래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학생의 평준화보다 교육여건의 평준화가 선행돼야

초기의 평준화를 위한 전략은 한 마디로 이른바 ‘일류학교’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일류학교를 없애면 평준화가 되고, 평준화가 되면 입시지옥도, 사교육도, 교육의 양극화도 없어진다는 생각이었다. 이때의 일류학교, 좋은 학교란 명문대학에 진학시킨 성과로 평가된다. 입시지옥도 사교육부담도 그런 일류학교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학교, 즉 학생들이 선택할 만한 학교란, 어떤 연유로든지 그 학교가 사회적으로 선점한 위세의 영향으로 인하여 우수한 학생들을 소유하게 된 학교, 그런 학교가 일류학교이고 명문고교이다. 명문 공립학교는 대개 지역별로 공공적 목적으로 집중 투자하여 육성한 학교이고, 명문 사립학교는 설립자가 건학이념을 분명히 천명하면서 학교경영에 성공한 경우이다.

대학취학률이 높아가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 이후의 명문 고등학교란 대개 대학진학에 성과를 거둔 학교를 말한다. 신흥 학교들 중에도 대학진학을 위한 특별한 전략으로 성과를 거두어 갑자기 명문학교로 평가받는 사례도 있었다. 교육 프로그램이 특별한 학교가 아니라, 학력에 있어서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여 대학진학에 성과를 거두는 요건을 갖춘 학교가 명문학교였다. 소위 일류대학에 많은 학생을 진학시키면 그런 학교에 경쟁력을 지닌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들고, 실력 있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기 때문에 해마다 진학의 성과를 어김없이 거두는 학교가 바로 명문 고등학교이다.

평준화 이전의 교육이 안고 있었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명문고교에의 진학을 위하여 경쟁하는 분위기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정부는 학생의 기계적 배치로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학교마다의 평균적 학력이 서로 비슷하게 되도록 조정하면 학교의 명성이나 위세로 인한 경쟁의 요인은 제거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즉, 학생들을 골고루 배정하면 명문학교는 사라진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무리수가 개재해 있었다. 하나는 이러한 기계적 배치는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교의 시설, 교사, 환경 등의 교육여건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을 강제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배치하였다. 좋은 교육여건을 가진 학교에 가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행운에 속하는 일이었다.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한 학생들은 불운을 그대로 감수해야 했다.

다른 하나는 평준화된 상태에서는 학교 간에 평균적 학력 수준의 차이는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학교 내에는 학력에 있어서 학생 간에 극심한 수준의 차이를 여전히 보인다는 것이다. 주지적 학력의 차이만이 취향과 소질이 다양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획일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골고루 학생들을 배정한 상태라면 표준적 교육과정을 운영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엄격히 생각해 보면, 어떤 의미에서 평준화의 기본적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의 질적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등교육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집단적 통일성을 기하기 위하여 체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유니폼을 입히는 것이 불합리한 생각이듯이, 능력과 취향과 경험이 다른 젊은이들에게 한가지의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모두를 교육하는 것은 평등교육이 아니다. 평등교육은 오히려, 마치 유니폼이라고 하더라도 각자의 몸에 맞는 옷이어야 하는 것과 같이, 교육받는 각자에게 ‘유의미한 학습의 장’이 실질적인 교육의 기회로서 제공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현행의 평준화는 서양의 속담으로 표현해서 ‘마차를 말의 앞에다 두고 끌게 한’ 것과 같다. 마차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그 반대로 했어야만 했다. 학교마다 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에 따른 교사, 시설, 환경 등의 교육여건에 있어서 필요충족의 격차가 없도록 평준화한 후에는 학생을 기계적으로 배정하지 않아도 학생들의 자연적인 선택에 의해서 평준화된다. 이러한 상태는 교육의 여건과 프로그램이 누구에게나 유의미한 정도가 비슷하게 될 것이므로 평등교육의 이념은 무리 없이 실현된다.

지금의 평준화 상태에서 학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하나는 이질집단을 한 교육장에 두고 있기 때문에 교육의 비효율성을 낳는다는 것이다. 현장의 교사들에 의하면, 주로 우수한 학생들과 열등한 학생들을 하나의 큰 교실에 두고 가르치자니 자연히 중간집단을 겨냥하게 되고, 우수집단과 열등집단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두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할 것 없이, 각자의 능력에 관계 없이, 모두가 똑같은 혹은 비슷한 내용으로 학습하면, 교육은 결국 ‘평균적 인간’을 기르는 일로 되어 버린다. 그러나 다양한 내용에 따라 다양한 수월성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획일적 내용은 전체적으로 거기에 잘 적응하는 우수한 집단과 그렇지 못한 열등한 집단으로 나누어 버린다. 이러한 문제는 평준화를 채택할 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예상된 문제를 두고 정부는, 그리고 개별학교는 거의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학업능력이 천차만별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 모두를 수준에 맞게 골고루 지도하지 못한다. 교사는 특정한 수준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업하기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는 오히려 다수의 학생들은 수업 중에 엎드려 잠을 자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면 교육수요자들에게는 어차피 학교의 선택이 허용되지도 않고 또한 의미도 없으므로 대신에 학군(學群)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관심의 전환이 생긴다. 학군에 따라서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 학생의 질, 그리고 시설과 화경 등의 교육여건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주거의 이동으로 학군의 선택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명문학교 대신에 ‘특별학군’이 부상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바로 서울 강남의 소위 ‘8학군’이 그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평준화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능력별 학교를 둔다는 것도 극히 안일한 사고방식이다. 이때의 능력이란 주로 주지적 능력을 의미한다. 교육적으로 유의미한 인간의 능력을 주지적 능력에만 한정시켜 두고 그 수준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하여 학교를, 특히 공립학교를 그 수준에 따라서 등급화한다는 것은 단순한 학교의 등급화 혹은 차등화 이상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출신학교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풍조가 만연해진다.

물론 주지적 능력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기술, 예술, 체육 등의 경우에도 능력별의 개념을 도입할 수 있고, 학교를 그런 능력을 중심으로 특성화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보통교육의 수준에 있는 고등학교이지만 이를 기능별로 전문화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성장하는 교육의 장과 그 프로그램을 이런 방식으로 전문화하면 특정분야의 전문인력은 양성될 수 있을지 모르나 특성상 학습경험 혹은 학습문화의 편협 혹은 빈곤이 초래될 수 있다.

인간의 능력은 그 종류에 있어서도 다양한 것이다. 평준화를 폐지하고 온갖 잠재적 능력들이 각기 실현될 수 있도록 전문화된 교육을 고등학교 수준에서 계획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적으로도 어렵고 교육적으로도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만 소수의 영재를 위한 프로그램은 예외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개별학교가 능력의 종류와 수준의 차이를 전제로 하는 다양한 학습경험의 장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립학교가 향유할 수 있는 교육의 장점이다. 학습경험의 다양성과 포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립학교는 제한된 혹은 다소 전문화된 목적의 실현을 지향하는 특수목적 학교나 특성화 학교나 사립학교 등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독특한 프로그램과 교육적 환경을 적절이 조성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공립학교는 결코 특수목적, 특성화, 자율화, 사립 등의 이름을 얻지 못한 “나머지 학교‘가 아니다. 오히려 중등교육의 중심부분에 점하고 있는 학교이며, 다른 학교들은 사회적 필요에 따른 보완적 제도에 불과하다.

얼핏 생각하기에 평등성은 획일성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교육 프로그램이 다양하지 않으면 교육의 기회는 결코 골고루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교육운영이 오늘의 대규모 학교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보기로는, 이러한 다양한 학습경험의 장을 비교적 용이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규모를 소형화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인접 학교와 공동으로 협력하여 서로 교류하면서 여건의 내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정책개발을 하는 것, 이것이 주지적 능력의 수준에 따라서 학교를 등급화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훨씬 더 교육적이다.

사립학교의 건학이념이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

지금의 중등사학은 건학이념의 구현도 보장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공적 책무성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애매하고 무기력한 위치에 놓여 있다. 우리 사회가 보통교육을 위하여 사학을 제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면 건학이념의 구현을 보장받고자 하는 사립학교는 평준화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하다.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의 열외에 있는 학교이지만, 공립학교의 제도 속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독특한 이념과 기능을 전제로 하는 학교이다. 그러므로 제도적 교육의 장을 다양화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학은 본래 그 자체가 지닌 건학이념에 의해서 존립이 정당화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념의 실현을 제도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고, 그러한 건학이념에 의해서 창출된 교육기회를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정책의 모순이다. 그러나 비록 사학이라고 하더라도 그 제도 자체가 공교육제도의 일환으로 운영되는 것이니만큼, 건학이념과 교육활동은 어디까지나 공교육제도의 기본적 이념과 일관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공립학교에서 충족될 수 없는 특수한 교육목적에 입각한 교육기회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 사학의 본질이다. 사학에의 취학은 어디까지나 건학이념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하여 교육수요자가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립학교가 여건상 학생의 정원 규모를 제한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도 설립목적과는 일관성이 없는 기준을 적용하여 어떤 대상을 배제할 수는 없어야 한다. 예컨대, 불교적인 인간상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것을 기본적인 건학이념으로 한 학교라면, 이 학교에 지원자가 많다고 해서 학생의 학업성적을 기준으로 하여 선발하는 것은 설립의 목적에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이때의 학업성적은 이 학교에서 수학가능한 수준이냐의 여부는 식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당 종파의 교리나 생활의 원리에서 세워진 학교방침에의 동의 여부로 선발의 기준이 설정되어야 한다.

대안적 제도의 학교들

일반 공립학교는 그것이 특별한 사회투자적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가 아니라면, 교육의 기회는 평등주의에 의해서 분배되는 것이 마땅하고, 국가나 자치단체는 주민들의 교육수요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면에, 예를 들어 영재교육기관, 특수목적 고등학교, 특성화 고등학교 등은 사회 혹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력의 양성과 충원의 계획에 따르는 것이므로, 이러한 교육은 그 자체로서 사회적 투자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창출되는 교육의 기회는 투자의 효율성을 기할 수 있는 대상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므로 능력주의의 원칙에 의해서 분배되어야 마땅하다.

우선 특수목적 고등학교나, 특성화 고등학교는 자체의 설립목적에 충실하게 운영되어야 하고, 그런 학교가 양성한 우수한 인재들이 본래의 목적에 맞는 진로를 밟는 경우에 그 진로를 물리적으로 가로막는 정책은 취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대학입시제도에서는 특수목적 고등학교, 특히 과학고등학교의 출신 학생은 정원규모로 인하여 내신성적 비율의 산출방식에서 분명히 불리한 위치에 있다. 정부가 이런 학교를 제도적으로 인가하고 또한 진흥해 놓고 거기서 배출되는 인력을 무용화시킨다면 사회적 낭비이며 또한 제도의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교의 출신자들이 실제로 특정 분야에서 우수한 집단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불이익을 입을 수 있는 대학선발제도에 대하여 정부가 평등주의적 잣대를 적용하고, 발생하는 문제를 소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치부하면서 성의있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공정치 못한 정책적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학교들이 제도적으로 어떤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 즉 이 학교들은 평준화 제도의 수정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평준화를 위협하는 요인이 내재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연상태에 두면 대체적으로 대학진학에 유리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기 때문에 일류대학에의 진학성과를 높일 수 있고, 따라서 그 고등학교 자체가 명문학교로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대학진학에 있어서 일반학교보다 더욱 유리한 경쟁력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등학교로 자녀들을 보내고자 하는 분위기가 준동할 수 있다. 이제는 대학입시의 준비 이전에 특정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중학교 수준에서 과외비, 학원비, 교재비 등 공교육비 이외의 추가 교육비(사교육비)가 발생한다. 추가 교육비의 격차가 결국 교육의 양극화를 발생시킨다는 이유 때문에 이를 평준화의 잠식으로 보고 극구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안적 제도의 학교들은 학생 선발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그 학교의 투자적 목적에 최선의 충실을 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수요자들에게 발생할 추가 교육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학생 선발에 있어서 학생의 성적이나 학력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체계적인 관찰을 통하여 잠재력과 성취동기의 수준을 점검하고, 급조된 능력보다는 숨겨진 잠재성과 가능성을 찾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학교들은 본래의 설립목적에 맞게 운영되어야 하고 그 성과도 그 목적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

평준화든 아니든 다원적 구조의 경쟁은 불가피하다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 이후에 세계화의 분위기 속에서 국제적 경쟁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고등학교 평준화가 지닌 역기능을 문제 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앞으로 국제화 혹은 개방화가 불가피하므로 국가는 모든 부문에서 경쟁력을 지녀야 하지만, 경쟁의 선봉대열에 포진해야 할 우수집단의 체계적인 발굴과 양성은 평준화 정책으로 인하여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옛날과 같이 많은 평범한 학교들 가운데 일류학교가 따로 있으면, 그러한 인재를 교육하는 것은 한결 용이하며 그것이야 말로 교육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수월성을 실현하는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교육의 세계에 경쟁의 원리가 도입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제도적 교육의 구조 속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교육에 있어서의 경쟁은 매우 신중하게 거론되어야 한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경쟁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경쟁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다고 여기는 찬성론자가 있다. 반면에 비록 일시적인 효율성과 외형상의 성과를 보일지는 모르지만 경쟁은 결과적으로 교육의 기본적인 가치와 궁극적인 성과를 파괴해버리는 위험한 요소를 잠복해 놓고 있다고 보는 반대론자도 있다.

현실적으로 교육의 실제 수요자인 학생들은 그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원하거나 않거나 간에 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 평준화 상태에서나 비평준화 상태에서나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적이 매겨지고 진학에 성공과 실패가 있고 좋은 성적과 좋은 학교는 취업과 생애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칭찬과 징벌 등으로 그들을 경쟁 속에 살게 하는 것이 학교이다. 점수를 잘 따서 성적을 좋게 하고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그리고 사회적 출세의 길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 이러한 생애를 세인들은 성공적인 삶이라고 평가한다. 학생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학부모들도 관심과 비용을 투자한다.

그러나 위대한 교육사상가들은 대체적으로 학생들을 비정한 경쟁의 굴레 속에 몰아넣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잠재력과 개성이 자유스럽게 계발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오늘의 교육은 어디에서나 이상과 현실에 엄청난 괴리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평준화 정책은 비정하고 소모적인 경쟁에서 인간성이 시들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서도 언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평준화 상태에서도 경쟁은 학습의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 악덕은 아니며, 근원적으로 교육의 장에서 제거해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비평준화 상태에 있으면 오늘의 대입제도의 내신 성적과 같이 ‘너와 나’를 한 줄로 세우는 ‘일원적’ 경쟁구조는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에게 헤어날 수 없는 족쇄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쟁의 경험은 피해가는 것이 좋겠지만, 어렵다면 되도록 뒤로, 즉 상급 학교 혹은 학년으로 미루어 경험토록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모두가 비좁은 한 골목으로 가면 질식하는 자가 생긴다.

그러나 평준화 상태이든 비평준화 상태이든 ‘다원적’ 경쟁구조, 즉 ‘너는 그것을 잘하느냐, 나는 이것을 잘할 수 있다’는 식의 경쟁구조는 선택의 폭을 넓히고 긴장을 이완시킬 수 있으므로, 비정한 경쟁과 치명적 실패의 숙명을 면할 수 있게 한다. 다양한 잠재력의 자유로운 계발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의 교육의 통로에서 한줄로 세울 것이 아니라, 충분한 선택의 폭이 가능하도록 여러 줄로 세울 필요가 있다. 또한 불가피한 제도적 상황에서 경쟁의 기회는 종류에 있어서 다양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패자의 부활’이 언제나 가능한 여유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