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가 따로 있는가? 맹자는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군자의 세가지 즐거움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맹자 당시의 영재는 뛰어난 문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영재는 문사로서의 영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통속적인 편견으로는 손발을 움직여서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영재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엄격히 생각해 보면 오늘날에는 생산적인 활동에도 이론적 지식이 필요하고, 과학적인 연구에도 실험이나 조사, 그리고 기기의 제작이나 사용과 같은 연구과정에 정교한 손발의 기술이 요구되기도 한다. 오늘에는 예술, 스포츠. 생산활동 등을 포함하여 인간생활의 모든 부문에 영재가 있다.

제5강 영재성, 창의성, 그리고 지능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영재가 따로 있는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보람과 즐거움을 말할 때 흔히 「맹자(孟子)」를 언급하기도 한다. 맹자는 군자(君子)에게 세 가지의 즐거움이 있다고 하였다. 양친이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들이 탈 없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첫째의 즐거움이고, 우러러보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둘째의 즐거움이며,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셋째의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영재를 발굴하고 교육하는 일을 포함하여 이 세 가지의 즐거움으로 말하면 나라의 왕으로서 천하를 통치한다고 해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군자가 누리는 특권이라고 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맹자가 말하는 “영재”는 어떤 사람을 일컫는 것인가를 두고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시대의 “뛰어난 문사”(文士)를 의미한다. 문사는 맹자가 말하는 “노심자”(勞心者)에 속하는 사람을 뜻한다. 말하자면 글을 익혀 머리를 쓰서 생각하고, 이치를 깨달아 밝히고, 삶의 도리를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안목과 능력을 가진 사람을 문사라고 한 것이다.

맹자는 이들과 구별되는 “노력자”(勞力者), 즉 몸을 움직여 힘을 쓰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바로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노심자를 부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맹자의 문사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자유인과 매우 유사하다. 즉 자유인은 생산에 종사하지 말아야 하고, 여가를 즐기면서 인간의 뛰어난 부분인 이성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맹자의 영재는 뛰어난 문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영재는 문사로서의 영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아직도 흔히 영재라고 하면 문학이나 과학의 경우처럼 주로 글을 익혀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통속적인 편견으로는 손발을 움직여서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영재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엄격히 생각해 보면 오늘날에는 생산적인 활동에도 이론적 지식이 필요하고, 과학적인 연구에도 실험이나 조사, 그리고 기기의 제작이나 사용과 같은 관찰의 과정에서 때로는 강력한 신체적 능력이, 때로는 정교한 손발의 기술이 요구되기도 한다. 우리가 탁월한 수술의 능력을 지닌 외과 의사의 경우를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탁월성은 반드시 이론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삶의 상황에서는 학술적-이론적 영역과 생산적-활동적 영역이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재는 무엇인가에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냥 무슨 능력이든지 남다르게 뛰어난 수준의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뛰어남은 적어도 “사회적 쓸모”를 전제로 한다. 영재는 한 개인에게 필요한 능력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으로 쓸모가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날의 영재, 즉 사회적 영재에는 문사에 속하는 사람들 이외에 수없이 다양한 범주에 속하는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사회의 어느 부문에서나 뛰어난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모든 부문에 각기의 영재가 있는 셈이다. 학술, 산업, 예술, 정치, 교육, 법률, 경제, 군사, 종교, 스포츠, 기능 등 수없이 많은 분야의 영재가 있다.

자신이 남다르게 독특하고 뛰어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사회적 쓸모를 지닌다면, 누구나가 적어도 “잠재적으로” 영재일 수 있다고 말해서 무리는 아니다. 물론 그 “사회적 쓸모”라는 효용도의 평가에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대체적으로 뛰어난 과학의 영재는 놀라운 마술(魔術)의 영재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높은 관심과 대우와 보상을 받는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사회적 인정도가 높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주로 “영재”라고 말하는 풍토가 있다. 그러나 사회적 효용성이라는 것도 시기에 따라서 변하고 사회의 사정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때는 학술에 뛰어난 사람이, 어떤 때는 기업에 탁월한 성과를 거둘 사람이, 어떤 때는 대중문화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또 어떤 때는 스포츠에서 참피언이 될 사람이 각광을 받고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종류의 영재성, 어쩌면 무한히 많은 영재성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영재에 “속하는 사람”과 영재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기가 어렵다. 누구는 영재에 속하고 누구는 영재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각자가 자신만이 지닌 독특하고 뛰어난 잠재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하고 능력을 발휘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사회적 영재의 위치에 서게 된다. 누구나 잠재적으로는 영재이다.

영재성과 창의성과 지능

영재가 영재로서 발휘해야 할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능력은 무엇보다도 창의력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므로 박식(博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영재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영재적 잠재력은 기본적으로 창의성의 잠재력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창의력을 말할 때 어떤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는 능력,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조달해내는 능력,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 기발한 착상의 능력 등을 언급한다. 정범모 교수는 창의력을 “새로운,” “보람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힘으로 요약해 정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정범모, 「창의력이란」 (서울: 교육과학사, 2001), p. 26.) 즉, 쉽게 말해서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어도 영재가 지녀야 하는 창의력은 온갖 잡다한 종류의 새로운 발상이나 성과를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도둑질을 잘한다거나, 교묘하게 사기를 치거나, 협잡에 뛰어난 재주를 부리는 사람도 그 “뛰어남(창의성)” 때문에 영재에 속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영재가 지녀야 하는 교육적 창의성은 다음의 요소들을 만족시키는 것을 뜻한다. (1)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문제의 해결이나 필요의 충족을 위하여, (2) 기본적인 이지적(理知的) 능력에 기초하여 발휘하는 것으로서, (3) 일시적 기지(機智)나 착상이 아니라 지속적 관심과 집착을 통하여, (4)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를 충족시키는 역량을 뜻하며, (5) 우연적인 발상의 결과라기보다는 하나의 인성적 특성으로 체질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창의성의 소유자는 일종의 “거대한 습관의 체제”로서 행동하고 생활하는 경지에 이른 인격체의 특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교육적 창의력을 말할 때, 적어도 먼저 질문해 볼 것은 그 대상이 되는 소재 혹은 내용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그 자체로서 계발되는 것인가이다. 즉 창의력이란 “일반지능”처럼 그것이 발휘되는 내용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능력의 일종인가? 여기서 “일반능력의 요인"(general factor, 단순히 g-factor)이라고 함은,  그것은 인지 능력과 인간 지능의 연구에서 사용되는 심리측정학적 용어이다. 인지적 능력을 요하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과업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각기 수행하는 과정에 긍정적 상관관계를 관찰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있다면, 즉, 예컨대 사물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과거의 사건도 잘 기억한다면, 기억력은 일반요인에 해당한다.)

그러한 일반의 경우라면 창의력이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 창의력, 예술적 창의력, 기술적 창의력, 전술적 창의력 등 그 어떤 이름의 것이라도 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창의력을 높이는 교육과정은 경험의 내용, 즉 정보, 지식, 이론 등을 학습하는 것보다는 창의적 문제해결의 사고와 연습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창의력과 지능의 상관관계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게 된 것은 1900년대 후반부터이다. 많은 연구의 잠정적 결론들은 주로 세 가지 이론적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시동이론”(Threshold Theory)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으로서, 창의력이 작용하는 데 있어서 지능은 하나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개 지능지수 120 정도를 필요도 한다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보증이론”(Certification Theory)으로서, 창의력은 본질적으로 지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창의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수준의 교육을 받거나 적절한 직업에 종사할 수 있어야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적어도 그러한 교육과 직업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지능은 소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방해이론”(Interference Theory)으로서 지능이 너무 뛰어나면 창의력은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창의력은 기계적 사고의 능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수준까지는 지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지능이라는 일반능력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면 오히려 사고는 창의력을 요하는 문제에 경직된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이론의 공통된 의견은 창의력과 지능이 어느 수준까지는 서로 작용하지만, 논리적으로 그 의미를 서로 내포하는 것도 아니며, 인과적으로 서로 충분조건의 관계에 있지도 않고,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능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창의력은 경험의 내용과 무관한 일반능력이 아니다

우선 내용에 관계없이 창의력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인가? 바둑이라는 게임, 적어도 유단자들이 즐기는 바둑이라는 것은 고도의 기본기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대단한 사고력과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게임이다. 그러나 바둑의 고단자가 그 능력으로 고도의 과학적 혹은 예술적 창의력도 발휘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세계교육사에서 오래전부터 논쟁의 대상이 된 “형식도야설”(formal discipline)의 진위에 관한 것이다.

과학적 창의력을 잘 발휘하는 사람이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도 그 능력을 반드시 잘 발휘한다고 보장하기는 어렵다. 내용이 다르면 창의력은 발휘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며, 내용과 더불어 창의력은 작용한다는 말이다. 흔히 창의력을 집중적으로 계발하기 위하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용을 지나치게 경시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지적(理知的) 창의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론, 지식, 정보, 규칙 등의 소재가 주어져야 하고, 그것을 조작할 수 있는 방법, 요령, 안목 등의 도구가 있어야 한다. 창의력을 발휘하자면 그것이 작용하기 위한 도구와 소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런 소재도 도구도 없는 텅 빈 방안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질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조잡한 소재를 가지고 기발한 방법으로 다루어 탁월하게 발휘되는 창의성이란 창의적일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그 내용은 하찮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격이 높은 지적 소재를 가지고 탁월한 도구를 사용하여 성취한 창의적 결과는 고도의 유의미한 창의성이 발휘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뛰어난 소재, 혹은 조잡한 소재는 재료 자체가 비싸다든가 싸다든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효용성을 지닌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구별되는 것이다. 쓰레기나 폐품이라도 소재의 효용성이 높을 수도 있다. 과학적, 예술적, 문학적 창의력이 바로 그런 것이다.

창의성을 위한 교육에서 내용 혹은 지식(이론)은 무용하거나 경시해야 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에 실어 놓은 지식, 이론, 사상 등의 내용은 대개 흔히 말하는 "천재들"이 개발한 것으로서 매우 탁월한 창의력을 발휘하여 생산한 것들이다. 뉴턴(Isaac Newton)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연히 발견한 창의력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뉴턴 이전에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지도 않았고 뉴턴 이외에도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뉴턴처럼 그러한 법칙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뉴턴이 지녔던 지식과 관심과 집착, 그리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의성의 질적 수준은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 즉 그 내용이 일차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창의성을 지녔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이런 사람은 박식할 수는 있으나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창의성에 있어서 내용은 학습자의 필요조건일 뿐이며 충분조건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창의성이 발휘되는 마음의 적절한 작용이 없이 단순히 마음속을 채우기만 하는 지식, 이론, 사상을 소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암기에 의한 지식, 점수따기식 교육의 결과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잡다한 지식과 정보들이 마음을 채우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법적 원리에 의해서 조직되고 다듬어지고 가공되고 사용되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좋은 교육을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고 창의력 또한 이 과정에서 작용하는 법이다.

창의력의 깊이와 넓이

그러면 창의력을 계발하기 위한 교육의 내용, 정보, 지식, 이론 등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집중해야 하는가? 야구선수로 키우기 위해서 야구만 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야구는 공을 던지고 받고 치고 달리고 하는 동작 이외에 게임의 규칙과 전략과 안목을 필요로 한다. 이에 맞는 체력을 소유해야 하고 야구장비의 성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경기에 나설 때에는 담력과 용기와 재치를 소유해야 한다. 야구란 이런 스포츠이다. 적어도 이런 정도만 구비하기 위해서도 야구선수로서의 학습의 과제는 적지 않게 많은 셈이다.

혹시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 탁구연습을 많이 하여 순발력을 키우고, 검도나 궁도를 해서 집중력을 높이고, 태권도나 유도를 해서 순간적 사태의 대응력을 높인다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야구선수에게 수학이니 과학이니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교과는 단순히 학생이 야구선수로서가 아니라, 이지적으로 도덕적으로 건강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교양적 목적으로밖에는 그 의미가 없는 것인가? 아마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야구선수가 그러듯이 수학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수학만 잘하게 하면 되는 것인가? 야구에서 하는 달리기, 던지기, 치기 등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하듯이, 스포츠는 종목마다에 한정된 기술과 능력이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수학도 자연과학, 사회과학, 철학, 기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이나 예술과도 무관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수학을 잘한다는 것은 수학이라는 독특한 영역에서만 아니라, 관련분야와 공유하는 영역에서도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에 수학자로서 통달해야 하는 전문적 영역의 범위가 있다면 교육과정에서 어느 정도로 넓혀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좁은 구역을 정해 놓고 깊게만 파고자 하면 그 깊이는 사실상 한계가 있다. 더욱 깊게 파기 위해서는 구역을 더욱 넓게 해서 파야 한다. 어떻게 넓혀야 하는가? 인접학문으로 그 영계를 넓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수학 혹은 물리학의 인접학문이라는 것의 전통적 관념이 최근에 와서 상당히 흐려지고 있다.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말하자면 자연과학의 한 분야는 자연과학이라는 영역에서만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과학, 예술, 스포츠 등을 인접으로 수용하려는 예상치 못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에서의 분야별 전문화와 분화현상은 한 분야 내의 전문적 분업의 형태만이 아니고, 인접과학과의 교차와 접변을 통하여 다시 통합되기도 하고 세분화되기도 하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과학에서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학문 영역간의 통합과 접변은 인접한 것과의 관계를 넘어 상상하기조차 힘든 엉뚱한 영역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여러 분야에서 전통적인 학문의 영역들 사이에 있던 벽들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학문영역들 간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통적 영역들 간의 접변으로 인한 재분화가 발생한 결과이기도 한다.

예컨대, 심리학은 과거에는 인접학문이라고 하면 기초부문에 철학을 들 수 있고, 응용부문에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교육학 등을 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심리학의 어떤 분야, 예컨대 뇌과학과 관련된 분야는 그것이 자연과학이라고 해야 할지 사회과학이라고 해야 할지를 구별하기 힘든 분야이기도 하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구별은 단지 관심의 집중 정도에 따른 구분이지 대상과 방법의 엄격한 경계를 둔 구분은 아니다. 그리고 많은 사회과학적 논의는 철학, 역사학, 문학 등의 인문과학과의 접변에 의한 연구과제들이 개발되고 있다.

잠재적 창의력을 체계적으로 발휘하는 데는 다소 전문화된 분야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문화의 분야가 어느 것이든지 간에 그 범위를 지나치도록 협소하게 규정하면 오히려 창의력 혹은 재능의 성장을 제한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전문적으로 집중하는 영역이나 관심사가 없이 방만하게 이것저것을 섭렵하여 초점을 잃으면 창의력이 충분히 계발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학습범위의 집중과 확대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는 영재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규칙이 있다기보다는 전문적 분야의 성격에 따라서 그 넓이와 깊이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직관적 판단이나 엄밀한 계산이나 이론적 유추를 통해서만 검토할 수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실천적 경험, 특히 장기적 경험을 요하는 문제도 얼마든지 있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