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는 규범적 언어를 그대로 개방적으로 방치하면, 임의의 정치권력이 그들의 자의적인 입법에 의해서 자유의 개념을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이에 따라서 독재적 목적으로 국민을 통제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국민에 의한 정당한 저항을 시도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없어질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표방하는 적지 않은 현대의 국가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독재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자유의 유지나 회복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감행할 수도 있는 국(시)민적 저항은 제한되거나 거부될 수도 있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관하여

-- 죄우파의 불협화음 --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approved by the National Assembly of France, 26 August 1789.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로 명기된 부분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에 근거하여 흔히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자유민주주의”는 때때로 “자유주의”로 약칭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특히 좌파의 논객들은 “자유주의”로 이해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런 것이 있다. 2011년 당시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가 역사 교과서를 비롯한 교과의 집필 지침을 밝힐 때, “민주주의”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에 좀 더 명확한 가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유민주주의”로 표현하자고 한 바가 있다.

그러나 특히 소위 좌파 세력의 반대로 그 의도가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이유인즉, 자유민주주의는 방임주의적 특징을 지닌 “고전적 자유주의” 혹은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신자유주의”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로 협소하게 이해되면, “민주주의”의 다른 외연의 의미, 예컨대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가치도 배제되므로 그 자체로서 헌법적 가치를 오도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중앙일보」 전자판, 2011.10.28. “자유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를 포괄하는 개념”의 기사에서, 한국현대사학회와 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그리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11년 10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동 4ㆍ19혁명기념도서관 회의실에서 개최한 '2011 자유민주주의 토론회'에서 한 교수는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수식 없이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보수 학계를 대표해 다른 교수는 이를 자유민주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민주주의”라는 말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영계로서 한정적 수식어가 붙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보다 “얼핏” 넓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문어적 구조로 보면 그러하지만, 의미론적 맥락에서 실제적인 가치선택의 경우를 보면 한정적 수식어가 붙지 않은 “민주주의”라는 말의 외연적 영계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보다 더욱 좁게 규정될 수 있다. 충분한 자유의 개념에 따른 가치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당한 정도의 개방적 다양성을 시사하는 “자유민주주의”를 공식화하면 어떤 민주주의의 유형보다도 가치선택의 폭을 넓게 가질 수 있다.

그냥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 통치권을 장악한 잠재적 혹은 실제적 독재세력은 자체가 임의적으로 규정하는 폐쇄적 가치체제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그 영계를 설정하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전형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례로 1960년대의 군사정권이 한때 유신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상당한 수준의 독재권력을 일시적으로 행사한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공식적으로 헌법에 명기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명시적 강령은 결국 어떤 통치세력에 의해서도 가치선택의 폭을 가장 넓게 보장하는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라는 규범적 언어를 그대로 개방적으로 방치하면, 임의의 정치권력이 그들의 자의적인 입법에 의해서 자유의 개념을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이에 따라서 독재적 목적으로 국민을 통제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국민에 의한 정당한 저항을 시도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없어질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표방하는 적지 않은 현대의 국가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독재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자유의 유지나 회복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감행할 수도 있는 국(시)민적 저항은 제한되거나 거부될 수도 있다.

근대에 이르러 전제군주의 체제를 종식시킨 후에 전개된 독재체제의 어느 유형도 스스로 “민주주의”를 내걸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해방 후의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를 천명한 독재적 정치권력을 경험한 적이 있고, 당시에 우리는 충분한 민주적 개방성과 다양성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각급학교 교육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로 이해되고, 이에 따라서 내면화된 민주적 가치관과 그 정신에 의해서 민중은 독재권력에 저항하였고 그러한 저항이 정당화된 것이 사실이다.

어떤 독재적 통치세력도 그냥 규정되지 않은 방만한 일반적 의미의 “민주주의”를 천명하기도 한다. 그러한 세력은 선택적으로 어떤 특정한 노선을 묵시적으로 혹은 기만적으로 지향하면서, 민주주의의 성격을 임의적 내용으로 집착한 상태에서 독재 혹은 횡포를 감행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민중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강력한 힘을 구축하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 통치세력은 이미 “민주주의로 포장된” 경직된 독재적 통치전략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오히려 우리가 문제로 삼아야 할 매우 중요한 내용이 남아 있다. 즉 우리의 「헌법」 전문에 포함되어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강령적 원리의 내포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유민주적 체제 자체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파괴적 세력의 도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여전히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광야의 독선주의로 암약하는 파괴적 저항세력이 다원주의의 원칙에 의해서 존재의 정당성을 보장받고,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력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한 바 있는 기만과 회유 등에 의한 선동주의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앞서, 이러한 실질적 가능성을 “개방적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절차적 중립성의 요청

자유민주주의와 다원주의에서 논의되는 중립성의 개방적 해석에 대하여, 반대론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개념, 예컨대 정의나 권리에 관한 일반원리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라고 해서 모든 종류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개방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한 탈규범적인 일반원리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생활방식을 선택하고 배격하는 규범적인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종적 편견에 근거하여 어떤 집단의 생활방식을 억압하거나 경멸하기를 요구하는 주장은 자유주의의 정신에 맞지 않다. 적어도 평등의 가치를 경시하거나 외면하는 노선의 사고도 그렇거니와, 퇴폐적 생활과 유해한 폭력적 행동을 일삼거나, 낭비와 무절제에 빠지는 허례와 허식을 조장하거나, 합리성도 일관된 근거도 없는 미신이나 허위를 추종하는 생활방식을 방치하거나 권고하는 풍토도 민주적 체제 속에 무조건 수용할 수는 없다.

불순한 정치적 동기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 되는 도덕적 부패의 증식을 주도하는 세력에 대한 방지책을 정착시킬 조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가 탈규범적인 일반원리가 아니라면, 이것 또한 민주주의의 개념을 규범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조정은 역시 다원주의적 사회에 요구되는 구성원(민중)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참여에 의한 정당한 "절차의 중립성"을 충족시키는 규칙의 경우에만 가능해 진다.

갈스톤(William A. Galston)은, 특히 절차의 중립성이 지니는 특징은 공공정책을 정당화하고자 할 때 내세우는 여러 가지 근거들에 대하여 특별한 제약조건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Liberal Purposes,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 101-102.) 어떤 의미에서 절차의 중립성은 자유주의에 관한 핵심적인 개념들을 함축하고 있어야 하며, 특히 자유민주적 평등의 개념이 반영되어야 한다. 즉, 모든 개인은 공적 자격으로 인하여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소수이지만 권리로서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신중히 구별토록 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분별력을 다시 환기시킨다.

결국 전통적으로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도덕적 강제성”을 배격하고 그것에 혐오감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말하자면, 개체 인간은 말로써나 물질로써나 간에 그들이 양심에 비추어 수용할 수 없는 가치관과 거기에 기초한 정책을 지지하도록 강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그 공동체의 존립을 보장하고 모든 구성원이 함께 추구하는 가치를 지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의지가 가장 폭넓게, 가장 합리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절차”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절차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더욱 자세히 검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