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체제와 질서를 지키려는 민주적 국가 혹은 조직에서, 지도자와 구성원이 함께 배려와 관용의 덕성을 보이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결코 성공적으로 정착하지 못한다고 해서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생활 민주주의와 학습기반 (6)

민주적 삶을 위한

“관용과 배려의 생활윤리”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얘교수)

민주주의, 자유와 평화의 삶을 보장하는가?

다원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개방적 민주주의의 사회에서는, 그 자체의 특성상, 여러 가지의 이유와 원인으로 인하여, 구성원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어느 다른 사회의 경우보다도 빈번히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흔히 개방적 민주주의를 철저히 누리면 많은 자유가 허용되고 유실한 평등사회가 이루어지므로, 경직된 비민주적 국가보다는 훨씬 양질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보장받는다고 생각한다.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방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체제 그 자체가 평화롭고 화목한 삶을 직접 제공해 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생활의 여러 면으로 개방적이고 허용적인 다원주의의 체제에서 삶을 영위하는 민주사회에서는 계명된 구성원의 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개방적 민주국가에는 상대적으로 다른 비민주적 국가보다 교육수준이 높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국가에서는 적어도 상당한 수준에서 크고 작은 갈등과 대립의 문제들을 이지적으로 해결하는 습관적 역량을 충실히 형성해 있다. 비교적 여건이 좋은 국가의 경우에 그러하다.

그러나 개방적 민주국가들 중에는 자체의 다원성과 개방성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하여 민주주의를 출범시킨 나라들 가운데 성공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장기간의 혼란 이후에야 겨우 자리를 잡게 된 나라들도 있다. 우리의 대한민국도 바로 후자의 경우이며, 아직도 온전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기가 어렵다. 제도적 민주주의는 도입했지만, 생활 민주주의적 기반이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민주주의적 삶을 위해서는 제도적 규칙만 잘 지키면 그런대로 좋은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안정된 도덕적 정서와 건강한 시민적 규범의식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일시적인 사소한 문제도 사회적 질서의 유지를 어렵게 하고 큰 혼란의 원인이 될 수가 있다.

우리는 생활 민주주의의 개념을 좀 더 심층적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성장세대나 기성세대나 간에 민주적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는 이지적 능력의 증진만이 아니라, 삶을 함께하는 이웃과는 어떤 정서와 의지로써 상대하고, 행동과 사고와 습관을 어떻게 더욱 성숙시켜 가야 하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울혈사회”라는 병리현상

최근에 우려스런 사회적 현상의 하나를 표현하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였다. “울혈사회”라는 말이 그것이다. “울혈(鬱血)”이라는 단어는 의학용어로서 혈액순환의 장애로 인하여 발생하는 질병 혹은 증상의 일종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일종의 사회적 병리현상을 언급하는 말로서 일부의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심리학적으로는 아마도 공격적 특징을 지닌 정서불안의 상태로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개체의 행동적 특징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현상으로 관찰되는 수준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상적인 접촉에서, 혹은 집단 간의 이해관계나 경쟁구도에서, 다소 불쾌하거나 적대적 자극이 다가오면 거기에 자제력을 잃고 극한적 반응을 하는 사례가 흔하게 관찰되고 있다. 우발적인 것도 있고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도 있다. 일회적으로 그냥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반응에 다시 더 높은 강도로 대응하면서 급기야는 상상을 초월한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의 사례가 일상적 생활 속에서 관찰되기도 하고 언론에서 빈번하게 보도되기도 한다.

어떤 불쾌한 자극이나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흔히 사람들은 쉽게 충돌하고, 격분하고, 울분을 발하고, 혈기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적의에 찬 싸움판이 쉽게 벌어진다. 아파트의 층간에 발생하는 충돌, 자동차 도로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운전자들 간의 불쾌한 감정과 보복적 행동의 돌출, 이러한 일들은 사소한 수준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크게는 가족관계, 사업관계, 집단이해관계, 정치노선 간에 발생하는 충돌과 갈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규모나 파급이 대단한 것도 있다.

막말, 욕설, 조롱, 폭언, 행패, 파손, 탈법 등의 일탈적 행동에서부터 폭력, 방화, 살인 등의 강력범행 수준에 이르기까지, 국민정서의 불안정이 위험한 수위에 있다고 봐야 할 정도로 우려스러운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비록 험악한 욕설과 폭력에 의하지는 않지만,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고 분노를 유발케 하는 자극적인 비아냥이나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공격적 언사가오가는 경우도 있다. 참아주고 견디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타협하는 배려와 관용의 마음씨가 사라져 가고, 문제를 순리보다는 욕설과 대결로써 폭력적으로 해결하려는 풍조가 만연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의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배려와 관용”: 행복윤리의 개념

“배려”와 “관용” 두 단어는 모두, 나와 어떤 특정한 타인의 사이에 어느 수준의 부담스런 이해관계가 놓여 있을 때,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거나 참작하여 상대방의 심리적 혹은 물질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가질 때 사용되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 혹은 물질적 부담은 사적인 관계에서 어느 누구가 지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공적인 관계에서 불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이 진 빚이나 곤경에 빠진 사람의 처지처럼 개인과 개인 사이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일 수도 있지만, 함부로 버린 오물로 인하여 누군가가 겪게 되는 불쾌감이나 피해와 같이 이웃이나 공중생활 속에 막연히 어떤 수준의 부담을 지우거나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

배려나 관용은 금전의 손해를 보는 것과 같이 직접적 손실을 염려해 주는 경우도 있고, 개울의 나무다리처럼 떠내려가면 사람들이 왕래하는 데 불편이 있다고 짐작하여 어떤 조치를 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일 수도 있다. 부담은 가벼운 불편일 수도 있지만, 치명적인 손실일 수도 있다. 배려와 관용은 내게 아무런 손해도 없이 베푸는 것일 수도 있고, 나의 이익이나 기회를 희생하면서 베푸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배려와 관용은 인간의 삶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에 속한다거나 반드시 이행하기를 강요하는 행위의 법칙과 같은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배려와 관용은 기본적 질서와 당위적 규칙으로 준수해야 하는 사회적 요구는 아니다. 그러나 실천되면 좋은 것, 바람직한 것, 아름다운 것, 즉 “미덕(美德)”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베풀어 주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제되지 않은 자발적 의지에 의한 실천을 기대하는 덕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려와 관용의 덕목(德目)은 일차적으로 도덕적 의무와 행위의 법칙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의무론적 윤리학(deontological ethics)”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인간의 행복과 선행에 관해서 논의하기를 좋아하는 “목적론적 윤리학(teleological ethics)”의 관심사이다. 후자를 쉽게 “행복윤리”라고 표현해 두어도 된다.

좀 더 설명하면, 목적론적 윤리학은 “좋은(선한) 행위”의 의미와 기준을 밝히는데 일차적 관심을 두고, 주로 인간의 존재와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러한 삶에서 요구되는 행위의 조건이 어떤 것이냐를 밝히고자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과 덕성(德性)의 윤리학, 쾌락주의자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에피큐루스(Epicurus) 학파의 윤리학, 그리고 벤담(Jeremy Bentham) 등의 공리주의 윤리학이 이에 속한다. 행복한(happy) 삶, 좋은(good) 행동, 덕스러운(virtuous) 행위, 쾌락한 생활(pleasant life) 등에 관심이 주어진다. 반면에 의무론적 윤리학은 주로 옳은(right) 행동, 의로운(just) 행위, 혹은 바른(righteous) 판단, 정의로운 사회(justice society)란 어떤 것이냐에 관하여 일차적 관심을 두고 논의해 왔다. 도덕적 행위의 “보편적 법칙”을 세우고자 한 칸트(I. Kant)의 윤리학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의무론적 가치는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도덕적 명령(imperative)과도 같은 것이지만, 목적론적 가치는 실현하면 이로운 것, 덕스러운 것, 바람직한 것, 행복한 삶에 기여하는 것으로 주로 강제보다는 자발적 실천을 권장하고 촉구하는 성격의 것이다. 개념적 특징상 배려와 관용은 상대적으로 목적론적 관심에 더욱 가까운 가치라고 볼 수 있다.

인간사회의 도덕적 삶을 의무론적으로만 치우쳐 규정하면, 합리적 질서와 엄격한 법도의의 기준이 유지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실천자의 자발성과 적극성이 수반되지 않은 불가피한 명령의 수행으로 묵종하는 수가 있다. 반면에 목적론적으로만 규정하면, 도덕적 요구를 감정이나 정서의 도움으로 해결하고자 하고, 기본적 질서나 합리적 사고의 철저를 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을 바르게 하고 또한 그 삶이 아름답게 되기를 원한다면, 어느 하나의 선택이 정답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도덕론적 관심의 차이는 서양의 윤리학에서만 아니라 동양의 유학사상에서도 유사한 것을 볼 수가 있다. 공자(孔子)의 “인(仁)”의 개념과 맹자(孟子)의 “의(義)”의 개념이 바로 그러하다. 물론 공맹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말할 때 “인의(仁義)의 사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인과 의의 어느 쪽에 일차적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무게의 비중은 다소 다를 수가 있다. 공자는 “인”을 주로 이야기하였고, 맹자는 “의”에 많은 관심을 두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적 비중을 보아 서양철학적 분류에 따라서 공자는 목적론자이고 맹자는 의무론자라고 규정해 버리기는 어렵다. 특히 맹자의 경우에 그의 성선설(性善說)에서 인간의 타고난 성품, 즉 착하고 좋은 성품을 중시하였고 그것이 만개(滿開)한 상태를 의미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목적론적 개념이다.

공자의 충서(忠恕)의 개념

— 배려와 관용의 기본 --

아마도 배려와 관용의 태도와 행동을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는 것으로 말하면, 공자의 충서의 개념 그 이상의 것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배려와 관용은 공자의 사상에서 중심되는 개념인 “인(仁)”의 사상에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인(仁)”을 “어질 인”이라고 하듯이 “어질다”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번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우리말의 “어질다”라는 말은 마음이 너그럽고 정이 두터우며 사려가 깊은 인격의 특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반면에 칼날같이 분명하고 사물을 보는 눈이 명석하고 지혜로우며 엄격할 뿐인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를 우리는 일상적 의미의 “어진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감싸주고 매사를 따지거나 밝히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이나 용서해 주는 심성의 소유자도 때때로 “어진 사람”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어질다”라는 우리말은 일상적인 용어로서 사용되는 것일 뿐, 그것으로 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체계적으로 밝힐 수 있는 이론적 언어는 아니다. 그러므로 유학(儒學)에서, 공자가 말한 “인”의 개념을 “어질다”의 말이 지니는 의미만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물론, 공자가 사용한 인의 개념에는 우리말의 “어질다”의 의미를 함께 포함하기도 하고, 또한 반드시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도록 강요한다면 “어질다”는 말 이외에 또 다른 좋은 표현이 없기도 하다.

공자가 제자인 증자(曾子)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한다. “삼(參: 증자)아, 내가 말하는 도(道)는 하나의 원리로 회통하는 것이다”(일이관지, 一以貫之)고 말하자, 증자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동료 제자들이 증자에게 스승이 말한 그 회통하는 원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충서일 따름이라”고 대답하였다.(논어 里仁 15) 증자가 “충서”(忠恕)를 공자가 말하는 회통의 원리라고 이해하는 것으로 언급한 이래 충서의 개념은 유가에서 인의 의미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충서에 대한 도덕론적 해석에 의하면, 자기가 바라는 것에 비추어 타인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때 그것을 “충(忠)”이라고 하고, 자기가 원치 않은 것에 비추어 타인이 원치 않는 바를 깨달을 때 그것을 “서(恕)”라고 한다. 충은 적극적인 개념으로서 인을 실천할 때 남을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신이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어지도록 해 주는 것”이 충이다.(논어 雍也 28) 이에 비하여 서(恕)는 소극적인 개념으로서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반드시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충”은 대체적으로 배려의 의미를 담고 있고 “서”는 주로 관용의 의미를 담고 있다. 위 문단의 해석에서 “충”이라는 글자의 자리에 “배려”라는 말로 대치해 보고, “서”라는 글자를 “관용”이라는 말로 대치해 보면 별로 어색함이 없이 문맥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 자기가 바라는 것에 비추어 타인이 원하는 바를 아는 것은 배려의 마음이고, 자기가 원치 않는 것에 비추어 타인이 원치 않는 것도 아는 것은 관용의 마음이다.

충서의 개념에 관해서 이해토록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들기도 하고, 반대로 소극적으로 하지 않도록 금지하는 내용을 들기도 하였다. 권고하는 내용으로는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군자로서 반드시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다고 겸손하게 반성하는 표현의 네 가지에서 읽을 수 있다.

... 자식들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어버이를 섬기지 못하였고, 신하들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지 못하였으며, 아우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형을 섬기지 못하였고, 벗들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먼저 벗들에게 베풀어 주지 못하였다. (중용 12)

즉, 내가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대로 내가 먼저 어버이를 섬기고 있어야 했고, 내가 신하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대로 내가 임금을 섬기고 있어야 했으며, 내가 아우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대로 내가 형을 섬기고 있어야 했고, 내가 벗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먼저 내가 벗들에게 베풀고 있어야 했다는 말이다.

내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경험했다면 일찍부터 나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변의 사람을 도우고 있어야 했고, 내가 칭찬을 받고 싶었듯이 남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했으며, 누군가가 나에게 충고를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면 내가 충고해주는 일을 지혜롭게 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공자가 겸손하게 뉘우친 말이지만, 일찍이 배려와 관용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말 것이며, 아랫사람으로 있으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여 윗사람을 섬길 때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다. 또한 앞선 위치에 있다고 하여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뒷사람에게 하도록 요구하지 말 것이며, 뒤를 잇는 위치에 있다고 하여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앞선 사람이 해 주도록 요구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다고 하여 왼쪽 사람에게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두고 거래하지 말 것이며, 왼쪽에 있다고 하여 오른쪽 사람에게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두고 거래하지 않는 법이다. 이것을 “혈구의 도”라고 한다.(대학 大學 10)

혈구의 도는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하기보다는 서로 자제하거나 자중할 소극적 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배려와 관용에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바도 있지만 다소 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태도와 행동이 있다. 지위와 직분에 있어서 상급자와 하급자, 선배와 후배, 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에서, 임무나 직책에서 선임자와 후임자의 사이에,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만 분담된 활동을 하는 팀이나 조직 사이에, 자기 방식의 생각과 행동으로 상대방과의 일을 관철하고자 하거나, 서로 불필요하게 간섭하거나 자기편의 이익이나 편의를 챙기려는 것을 자제하는 것 자체가 적극적으로 도우고 베푸는 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처신일 수가 있다.

배려와 관용은 덕성의 기본

공자는 자신이 했어야 할 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주로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형과 아우, 친구의 사이를 든 것은 단지 구체적 인간관계의 예를 든 것일 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와는 멀고 가까운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조직에 대하여 충서의 개념은 유의미한 것이다. 아마도 공자도 그런 폭으로 생각한 것을 구체적 관계로 언급했을 따름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혈구의 도는 그 의미하는 바가 주로 어떤 관직자들의 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위와 아래, 앞과 뒤, 그리고 좌우의 위치로 말할 수 있는 관계는 무수히 많다. 직장의 상하 관계도 있지만 상인과 고객, 공직자와 일반인, 그리고 연령으로 인한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요구하는 상황, 요사이는 일종의 속칭으로 “갑”과 “을”의 관계로 표현하는 경우 등이 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장소나 차례를 먼저 사용한 사람들과 뒤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고,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동시에 서로 장소나 기물이나 시설을 사용하거나 서로 거래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인간관계가 단순하고 구별이 쉬우므로 설명의 사례도 구체적이었다. 충서의 개념이나 혈구의 도가 오늘의 복잡하고 급변하는 상황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함축된 도덕적 원리의 의미와 지혜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다만 인간관계의 구조는 엄청나게 복잡해 졌으므로 실천하는 사람은 단순히 “기계적” 습관으로써가 아니라 지혜와 성찰과 판단을 함께 하면서 상황 상황에 임해야 한다.

배려와 관용은 나와의 이해관계가 없이도 남에게 베푸는 미덕이다. 일상생활에서 타인, 이웃, 친구에게 베푸는 배려는 가벼운 것이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돋우고 인간관계를 평화롭고 아름답게 하는 “약념”과 같은 것이다. 배려의 정도가 특별히 높은 경우에는 자신의 희생이 따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배려를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높이 칭송하기도 한다. 관용은 나의 이익이나 주장을 유보하면서 나로 인하여 타인이 불리한 상황에 들지 않도록 마음을 써주는 소극적 배려의 태도를 의미한다. 나에게 혹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였거나 손해를 끼쳤을 때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태도를 일컬어 “관용”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관용,” 특히 영어로 번역한 “tolerance”라는 말의 독특한 쓰임새는 때때로 “다른 생각,” “다른 의견,” “다른 신념,” 그리고 “다른 처지”를 존중해 주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열린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관용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처지를 함께 고려하여 성찰해 보고 자신의 이익이나 주장이나 신념을 철저히 관철하려는 태도를 유보하고, 자신과 동등한 처지로 타인을 수용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이념, 종교적 신념, 지역적-집단적 이해관계 등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서로 대하는 것도 관용의 개념이 의미하는 바로 이해하기도 한다.

배려와 관용이 없으면 친구 사이도 언젠가는 서로 적이 될 수 있고, 배려와 관용이 있으면 비록 서로 적인 사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친구가 된다. 배려와 관용으로 대하면 나와 무관한 사이의 사람도 가까운 이웃이 되고, 가까운 이웃이라도 서로 사이에 배려와 관용이 없으면 낯선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이가 된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조직과 조직,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배려와 관용은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사이를 평화롭게 하고, 여러 가지로 서로가 보람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터전을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배려와 관용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행해질 수 있는 온갖 가능한 미덕의 전형적인 것에 속한다.

관용과 배려에 관련하여 성찰해 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두 인물을 기억할 것이다. 한 인물은 소설 속의 주인공인 가상적 인물이고, 또 한 인물은 실제로 영웅적인 생애를 보낸 정치가이다. 두 사람은 관용과 배려, 특히 위대한 관용의 본을 보여 준 인물이다.

빅토르 유고(Victor-Marie Hugo, 1802-1885)의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잔 발장은 19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풀려난 어느 날 한 주교의 집에서 은 식기를 훔쳤다가 발각된다.

주교는 그를 용서하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장발장의 필요를 헤아려서 은식기보다 더욱 값비싼 촛대를 준다. 관용과 배려가 동시에 베풀어지는 장면이다. 신분을 감추고 도피자로 지내던 장발장은 후일에 한 도시의 시장이 되고 가난과 고통으로 살던 사람들을 도우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그는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경직된 자베르 경감과의 악연으로 인하여 도피자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혁명군에게 잡힌 자베르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장발장은 오히려 그를 구하는 일을 도운다. 그의 관용으로 풀려난 자베르는 심경에 변화가 오고 내심의 동요를 견디지 못하여 강물에 투신하고 만다.

관용으로 말하면, 우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 대통령이 그야말로 “위대한 용서”를 통하여 남아공을 평화로운 민주국가로 재탄생시킨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실로 관용이 어떤 것이며 용서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보여준 인물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27년동안 정치범으로서 옥고를 치르는 등 백인정권의 철저한 흑백차별 정책에 맞서 현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 National Congress, ANC)를 이끌면서 투쟁하였다. 대학살까지도 자행하면서 강경탄압을 유지해 오던 백인정권은 마침내 노조의 파업 투쟁 등 국내적 저항과 국제사회의 제재 등 압력에 더 이상 흑인탄압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흑백차별의 정책기조를 유지하던 시대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클레르크(F.W. de Klerk) 대통령은 만델라를 석방하는 한편 흑인 정당을 합법조직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백인정권과 흑인단체 등이 협상에 나서 이후의 민주화 시대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데 만델라는 주역을 하였다. 이를 통해 1994년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고 시장경제의 틀을 유지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만델라는 1991년 ANC 총재로 취임했고, 1994년 4월에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민주적 선거에서 ANC가 다수당으로 승리했다. 이를 통해 흑백차별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식되고, 만델라는 이 나라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만델라는 백인사회에 대한 보복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를 출범시켜 피를 흘리지 않고 과거사를 정리했다. 흑인을 탄압하던 백인을 용서와 화합의 정신으로 포용해 무지개처럼 서로 다른 인종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백인정권 당시 경찰, 군대 등 안보 기관에 근무하면서 흑인에 대한 테러와 인권탄압을 자행한 가해자라도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할 경우에 사면하는 대화합의 조치를 취하였다.

탄압을 받던 피지배 계층이 권력을 장악한 뒤 압제자들을 대거 숙청하지 않고 평화공존을 도모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그는 또 권력욕을 버리고 대통령 자리를 물러난 뒤에도 인류 평화를 위한 외길에 매진함으로써 남아공은 물론 세계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자”의 길을 걸어왔다. 브라운(Gordon Brown) 전 영국 총리는 2006년 11월 남아공의 일간신문 프리토리아(Pretoria) 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만델라의 위대함은 증오하기를 거부하고 다인종 국가인 남아공을 탄생시킨 것”이라며 유혈사태 없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점을 극찬하면서 만델라를 우리 시대의 “생존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맺음말

배려와 관용이 없으면 친구 사이도 언젠가는 서로 적이 될 수 있고, 배려와 관용이 있으면 비록 서로 적이 된 사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친구가 된다. 배려와 관용으로 대하면 나와 무관한 사이의 사람도 가까운 이웃이 되고, 가까운 이웃이라도 서로 사이에 배려와 관용이 없으면 낯선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이가 된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조직과 조직,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배려와 관용은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사이를 평화롭게 하고, 여러 가지로 서로가 보람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터전을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배려와 관용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행해질 수 있는 온갖 가능한 미덕의 전형적인 것에 속한다. 특히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체제와 질서를 지키려는 민주적 국가 혹은 조직에서, 지도자 혹은 구성원이 배려와 관용의 덕성을 보이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결코 성공적으로 정착하지 못한다고 해서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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