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혁명과정에서라도 수단은, 인류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도덕적 목적에 근거하여 추구하고 채택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적이고 실제적인 법칙에서 도출된 것이어야 한다.

생활민주주의기반 (9)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

                          John Dewey                                                                   Leon Trotsky
                          John Dewey                                                                   Leon Trotsky

 

개인이나 가정의 생활에서 계획이 있고, 단체나 조직에서 사업이 있으며, 정부 혹은 국가에서 정책이 있다. 이러한 계획, 사업, 정책 등은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가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 혹은 발전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시로 혹은 정기적으로 구상하여 결정하기도 한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의 안전한 기반을 위하여 혹은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결정하는 계획, 사업, 정책에는 대체로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정례적인 것도 있고 매우 특수한 것도 있으며, 당장에 실현해야 하는 것도 있고 장기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도 있다. 어떤 경우에든지 설정된 목적(혹은 과업)은 사회적으로 수용하는 가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혹은 방법)도 또한 반사회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가치와 수단가치가 반드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의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기도 한다. 순리로 보아, 목적가치가 정당화되고 수단가치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책적 목적가치가 정당하고 필요불급한 것이면,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가치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이 어떤 수단이든지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두고 논쟁을 한 유명한 사례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소비에트의 트로츠키(Leon Trotsky)와 미국의 철학자 듀이(John Dewey)의 사이에 있었던 논쟁이다.

듀이와 트로츠키의 만남

존 듀이는 1937년에 볼셰비키 혁명당의 주요 인물인 마르크스주의자 레온 트로츠키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곡절은 매우 특이하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1917년의 이른바 “10월 혁명”을 성공시키고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한 중심적 인물에 속한다. 그러나, 레닌이 죽은 후에,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고, 결국 “인민의 적”으로 몰려 소비에트 연방에서 쫓겨나 멕시코로 망명한 신세가 되었다. 망명 중인 트로츠키는 모스코바의 궐석재판에서 그가 산업활동을 방해하고,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폭력단체를 조직하며, 소비에트로 하여금 자본주의로 회귀토록 하여 이를 해체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하였고, 독일과 일본과 작당하여 전쟁을 시작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바로 그 재판의 공정성을 심리하기 위한 사설 위원회가 미국의 민간단체에 의해서 조직되고, 멕시코에서 열리는 청문회의 의장으로 존·듀이가 초빙되었다. 듀이는 심리를 진행하는 중에, 마르크스주의, 특히 “세계를 공산화한다”는 목표를 둔 트로츠키 자신의 “연속혁명론”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상대로 특별한 논쟁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소설가 패럴(James T. Farrell)이 듀이가 활동한 내용을 실지로 관찰하여 기록한 것이 있다. 패럴은 1937년에 레온 트로츠키와 그의 아들을 상대로 불리한 판결을 내린 모스코바 재판(1936-1937)을 심리하고, 트로츠키 변호를 위하여 미국 위원회가 계획을 세웠음을 상기시켰다.(Farrell, 1950).

패럴은 이렇게 전했다. 즉, 듀이는 78세의 나이가 될 때까지 「논리학」을 집필하는 중에 있었으며, 어느 편에 속한 사람도 공감하는 원리를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문회 참석자를 살해하려는 위협에 몸소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듀이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생각에 일치하지 않은 견해라도 역사적인 단안이 필요하면, 이와 동조하는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서로 기탄없는 의견이 오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지 한 것이다.

패럴의 보고서에 의하면, 애초에 트로츠키는 78세의 연로한 듀이가 청문회의 번거로운 절차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에 회의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여전히 철학적으로는 대중적 경험주의자로 보기는 하지만, 트로츠키는 결국 듀이라는 인물과 그의 이념에 대한 깊은 존경에 빠지게 된다. 또한 듀이는 트로츠키가 지성을 갖춘 명석함을 높이 보았다. 듀이가 말하기를,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8일간의 복잡한 증인 진술에서 트로츠키는 어리석은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인간적 가치가 말살되는 무서운 실상이 소비에트에서 자행된 것을 그대로 그려냈다고 하였다.

인간해방과 세계공산화 사상의 경직성

그러나 패럴에 의하면, 트로츠키가 듀이에게 준 가장 강력한 인상은 결과적으로 “절대주의”에 대한 집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 주었고 듀이도 그렇게 판단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듀이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할 수밖에 없는 최종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즉 절대주의자라는 판단은 듀이가 멕시코에서 직접 경험한 것의 결과로서 떠오른 것이며, 계속된 모임에서 직접 트로츠키와의 토론을 통하여 확인하기도 하였다.(Dewey 외, 1969)

대면 질의를 통하여, 듀이는 트로츠키에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니고 있던 세계혁명의 사상은 1917년 이래 진행된 사건들로 보아 허위라고 밝혀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스페인의 상황이나 프랑스의 상황을 보면 여전히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피하며, 인류에 유익하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듀이는 더욱 다그쳐 묻기로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도 트로츠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큼 충분히 국제적 감각을 가지고 움직이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트로츠키는 답하기를 자본주의자들은 혁명당이 출범할 필연성을 주장할 정도로 아직 프롤레타리아를 국제적 수준의 사회주의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듀이는 다시 다그치기로,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동시에 발발할 가능성이 있느냐고 물었고, 트로츠키는 물론 그것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대답하였다. 역사적 상황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어떤 예측도 합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확신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듀이는 특히 독일혁명이 실패한 것과 관련하여 질문했을 때, 트로츠키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사회 민주주의의 체제에 질식되어 버린 탓이라고 하였다.

듀이는 마르크주의자의 이론이 제시하는 혁명의 불가피성을 비판하면서 트로츠키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조건이 아직 충족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역사적 조건을 고집스럽게 언급한 것이다. 듀이는 트로츠키의 이론적 구조가 꼼짝하지 않는 것은 절대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패럴이 전한 바로는, 듀이가 트로츠키에 대하여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인상을 표현하면, 이러하다고 하였다. 즉 “트로츠키 그는 비극이었다. 천부적 재능이 절대주의에 갇혀 있구나.”

듀이는 그 청문회로 인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상에 관한 절실한 경험을 하였고, 그가 여태 소비에트에 관하여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장시간의 것이기도 하고, 또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증거의 자료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트로츠키를 통하여 소비에트를 가장 확실하게 경험한 셈이다. 단순히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하나의 병리적 고질로 인하여 희생된 사람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 그것만은 아니다.

듀이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인물들, 그들이 목적하는 바는 그들이 지닌 좋은 의도 그 자체를 무색케 할 정도로 독선적 방법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듀이에 비치는 마르크스주의는 그 자체에 아무리 인도적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어떤 다른 도그마와 마찬가지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트로츠키의 청문회를 통하여 듀이는 멕시코의 경험 이후에 관심의 폭을 크게 넓히게 되었다. 그는 어떤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불가피함을 빙자한 수단”을 견지하는 것, 예컨대 폭력 등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지력”(intelligence)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초적인 생산의 수단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회적 지력은 과학적 공학으로 구성된 것이며 현대적 생산력으로 작용한다고 하였다. (Dewey, 1935.) 듀이는 마르크스가 옹호하는 혁명적 변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은 결국 문명된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요컨대 그는 인간의 지력, 특히 과학적 지력을 다할 수 있는 사회를 계획하여야 하고, 사회의 생산력도 거기에 기대하여야 하며, 혁명적 변화는 문명의 파괴를 초래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듀이가 트로츠키를 다른 기회에 간접적으로 만나게 된 것으로는 1938년에 뉴인터네셔널(The New International)에 실린 몇 페이지를 통해서였다. 단지 각기 한 번씩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서로 길게 견해를 교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여전히 트로츠키는 “그들의 도덕성과 우리의 도덕성”(Trotsky, 1979)이라는 글에서, 그리고 듀이는 “수단과 목적”(Means and Ends)이라는 글에서 직접적인 쟁점에 집중할 기회가 주어졌다. 트로츠키는 단지 추구하는 목적만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계급투쟁의 모든 수단은 인간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단합케 하는 수단, 바로 그 수단만은 허용될 수 있고 또한 의무 사항에 속한다는 것이다.

듀이 역시 수단과 목적의 상호연결을 상정하였다. 실로 듀이와 트로츠키가 공유하고 있는 헤겔 사상적 기원은 많은 공통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듀이는 트로츠키가 인간성의 해방을 우선적인 도덕적 목적으로 설정한 것에 직접 도전하지는 않았다. 트로츠키의 주장에 대한 듀이의 공격은 어느 수단이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게 하는가에 대하여 실험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 없이 특정한 목적을 지속적으로 견지한다는 데 표적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트로츠키는 중대한 인간해방의 수단으로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언급하고 있다.

과학적 사고와 목적-수단의 재검토

분명히 듀이는 수단과 목적의 상호관계에 관한 트로츠키의 해석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사실상,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어떤 목적도 궁극적인 것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특정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 사용된 바로 그 수단 자체가 애초에 그 목적이 성립될 때의 객관적 조건을 바꾸어 놓는 경우가 있다.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목적은 종종 조정되어야 한다. (수단은 가끔 목적을 조정토록 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만약에 그 목적이 조정되지 않으면 자체의 타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수단 역시 목적의 개념이 나아가는 방향에 따라서 적응을 필요로 하게 된다. 목적은 일단 정해지면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을 거기에 맞추어 조직하는 불가결한 기능을 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지만, 목적을 보충해서 다시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 수단이 목적의 수정을 요청하게 된다.

트로츠키의 논거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듀이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즉, 쟁점은 단지 추상적인 도덕적 이론의 문제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쟁점은 소비에트 혁명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이다. 그 혁명과정에서 수단은 인류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도덕적 목적에 근거하여 추구하고 채택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적이고 실제적인 법칙에서 도출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했을 때 더욱 제대로 이해 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Dewey, 1979).

듀이가 보기로는, 어쩌면 트로츠키도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각을 같이 할 수도 있지만 경직된 스타린주의자는 그러한 의도를 공유할 이유가 없다. 또한 그런 의도는 어떤 역사적 이론으로도 도덕적이라고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확실하고 진실된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는 역사의 목적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모든 선한 의지의 소유자들이라면 마땅히 동조해야 한다는 식의 역사적 목적의 실체화(hypostatization)에 믿음을 두고 있다. 즉 그 역사적 목적이 구체적 실체처럼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그 이론 자체와 실천적 방법의 선험적 성격으로 인하여 과학적 검토를 어렵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오히려 그 명분에 따라 자의적으로 자신의 길을 가는 악의적 독재자들을 감싸는 결과를 가져 왔다.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복잡한 책략과 자기기만을 쓰면서 비판세력을 겨냥한다. 듀이는 본질적으로 공공적이고 민주적인 특징을 지닌 실험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료>

Dewey, John. 1935. Liberalism and Social Action. New York: Capricorn.

Dewey, John, Carleton Beak, Otto Ruehle, Benjamin Stolberg, and Suzanne La Follette. 1969. The Case of Leon Trotsky. New York: Merit.

Diggins, John P. 1994. Th Promise of Pragmatism.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Farrell, James T. 1950. “Dewey in Mexico.” Pp. 351-377 in Sidney Hook (ed.), John Dewey: Philosopher of Science and Freedom. New York: Dial Press.

Moreno, J.D., R.S. Frey. 1985. Dewey's Critique of Marxism. The Sociological Quarterly, Volume 26, Number 1, pp. 21-34.

Trotsky, Leon. John Dewey, and George Novack. 1979. Their Morals and Ours. New York: Pathfinder Press.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