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정치적 갈등과 대립과 투쟁은, 근원적으로는 사실상 민주주의가 허용하고 귀하게 여기며 집착하는 다원주의에 연유한 것임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에 있어서 다원주의는 실현하고 성취해야 할 과제이면서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부담이며 “멍에”이기도 하다.

생활민주주의 기반(10)

민주적 다원주의와 갈등현상, 퇴행적 징후인가?

-- 우리 사회의 과제 --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어느 수준의 것이든지 간에, 하나의 조직 혹은 공동체가 (자유) 민주주의를 생활의 양식이나 규범으로 수용하고 충실히 거기에 적응하는 삶을 당연시한다면, 구성원의 각각은 누구나 적어도 인격적 존엄성이 보호를 받고, 묵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허용된 자유를 충실히 누릴 수 있으며, 부당하게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 말이 본질적으로 당연하다면, 구성원은 각각이 지닌 개성과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로 인하여 상당한 정도로 서로 다른 삶의 형태를 표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조직에서 다원주의적 특징은 허용적이고, 구성원의 각각은 인격의 존엄, 의사의 표현, 가치의 지향에 있어서 개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적 의식은 암묵적 혹은 명시적 규칙의 체제를 수용하고, 이에 따른 적응의 습관이 지배하고 있다. 우선 자유와 평등의 개념에도 어떤 획일적 혹은 폐쇄적 한계를 설정하기보다는, 가능하면 그 개방성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이념적 향방과 일관성을 지니는 길이다. 정치제도로서 혹은 생활양식으로서, 민주주의는 이러한 다원주의에 허용적일 수밖에 없다.

복합적 다원화

정치적 다원주의에 관한 논의는 주로 국민이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얼마나 보장받을 수 있으며, 또한 국가 혹은 정부가 어느 정도까지 이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가치체제가 존재한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정치적 다원주의 중에서 가장 강력한 주장은 단정적으로 모든 가치체제는 그 격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다소 약한 수준의 것은 모든 가치체제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다소 미온적인 주장은 가치체제들 중에서 적어도 어떤 것들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의 가장 고전적 형태는 정치행위와 의사결정은 주로 “정부(국가)”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며, 비정부집단은 거기에 영향을 주는 일종의 압력집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고전적 다원주의는 정치적 과정에서 권력과 압력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에 일차적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와 정책결정을 설명하는 다원주의의 이론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르러 특히 미국에서 대단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종래의 다원주의 이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신다원주의”(neo-pluralism)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새로운 목소리는 권력분배에 관련하여 종전과는 다른 견해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많은 압력집단이 존재하지만, 종래와 같이 주로 법정기구의 권력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평가하였다. 말하자면, 고전적 다원주의는 국가의 정치문화적 다원성에 한정된 것이지만, 신다원주의는 사회문화적 다원주의의 개념으로 확장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다원주의자들은, 국가란 이제 더 이상 여러 이해집단의 요구들을 중재하고 판결하는 심판자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며, 단지 여러 하부조직의 활동을 통하여 부분적인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기구로서 일종의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여긴다. 다원주의 안에서 정치문화의 중추적 위치에 있다고 인식되었던 헌법적 규칙들도 이제는 다양성의 맥락에서 검토하게 되고, 경제적 자원의 명백한 불균등도 그대로 유지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사회-경제적 힘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이며, 정치적 선택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어떤 집단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고 또 어떤 집단에게는 제약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코놀리(William E. Connolly)는 신앙과 민족의 다양성을 비롯하여 성별 활동, 혼인 관계, 언어 사용, 친교 관계, 친족 모임 등에까지 다양성의 개념을 확대하여 “복합적 다원화”를 기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Pluralism. Durham : Duke University Press, 2005)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원주의와 함께 논의되는 강조점이 바뀌게 된다. 시민권에 관련된 운동들은 이전까지만 해도 변방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 집단에서 새로운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성별적 역할과 차이에 관하여, 인종적 특성의 차이와 관련하여, 민족적 기원을 중심으로, 사회적 계급에 관련하여, 세대 차이와 연령층의 문제로, 신체적 조건에 관련하여, 양심과 도덕의 문제로 인하여, 종교적 갈등과 차등의 문제로 인하여 등등, 수없이 많은 집단의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회 정책의 중심적 과제는 이제 차별성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쯤에서 보면, 민주국가의 다원주의는 그 외연이 크게 넓혀지고, 그만큼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부문을 중심으로 다원적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매우 확대되었다. 지역, 인종, 성별, 계층, 신앙 등을 포함하여 사회의 여러 구성원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의 종류와 수준이 크게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확장의 추세는 전통적인 관념의 보수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매우 급진적인 관념의 진보적 민주주의로도 감당하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 갈등현상의 폭주는 절제되지 않은 공격적 충돌의 형태로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결국 어느 사회에서든지 간에 과격해지고 극심해진 온갖 갈등들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민주주의의 유지, 안착, 발전의 관건이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갈등을 두려워하여 “필요악”이라는 구실로, 그리고 다원주의적 구조의 특징이 복잡한 갈등을 증대시키고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한다고 하여, 물리적 힘으로 이를 제재하려는 조치도 취해지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만으로, 다원주의의 폭을 물리적으로 제한하려는 시도가 결코 성공적인 민주주의의 성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확히 말해서, 민주주의의 다원주의적 특성은, 구성원의 자유와 평등과 성장 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논리적-규범적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꾀어야 보배

-- 준비 없이 주어진 민주주의 --

개방적 민주국가의 경우에, 폭넓은 다원주의는 인종적 기원, 종교적 신념, 전통적 관습, 정치적 체제, 경제적 수준, 지역적 특성 등을 포함하며, 성별, 계층, 생활조건, 역사적 배경이 작용하여 형성된 가치관과 문제의식의 다양성으로 인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개방적 민주국가의 경우에, 서로 간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의 잠재적 요소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당면하는 문제들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개방적 심성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전통을 구축하지 못하면, 오히려 상당한 정도의 폐쇄적 사회의 경우보다도 더욱 혼란스럽고 살벌한 분위기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사회적 조직과 운영의 기조로 삼고 이에 따른 삶을 영위하고자 할 때, 수없이 많은 위기와 파산의 경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때로는 조직의 전면적 붕괴까지도 우려해야 하는 문제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도 바로 다원주의에의 집착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정치적 갈등과 대립과 투쟁은,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근원적으로는 사실상 민주주의가 허용하고 귀하게 여기며 집착하는 다원주의에 연유한 것임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에 있어서 다원주의는 실현하고 성취해야 할 과제이면서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부담이며 “멍에”이기도 하다.

다원주의에 기반을 두고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개방적 민주주의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를 언급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첫째, 몇몇의 사례를 보면 개방적 민주주의의 체제는 대개가 “혁명”에 의한 쟁취의 결과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상당한 정도로 구성원의 세련된 정치의식과 생활습관을 포함한 정치문화의 기반을 요청하지만, 혁명에 의한 급격한 사회적 변화는 개방적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한 기반을 제대로 조성할 준비의 여유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같은 맥락이지만, “정치 민주주의”는 “생활 민주주의”의 기반 없이는 제대로 정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미국의 독립혁명을 비롯하여 민주주의는 종전의 절대권력을 장악한 독재체제를 붕괴시킨 시민혁명의 결과로 쟁취된 것이었다. 상당한 기간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국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서구의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였고, 새로운 국가의 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쟁과 부조리와 혼란을 포함한 새로운 장벽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응하는 이승만 정권은 독재체제로 회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80 여년이 지난 아직도, 우리는 민주국가라고 하기에는 서툴고 비능률적이며 경직된 투쟁의 장을 이어가는 풍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왜곡된 정치 민주주의적 타성만을 절제 없이 강행할 것이 아니라, 각급학교의 제도를 비롯하여 생활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의 장을 넓히고, 생활인의 차원에서 “입법과 준법”을 비롯한 기본적 규칙, 그리고 “관용과 배려”를 비롯한 실천 상의 덕목을 내면화하여 생활 민주주의의 윤리적 바탕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노력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이미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한 경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심각한 종교적-인종적 갈등이 없고,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정치의식이 고조된 상태에 있으며, 사회적 소통의 인프라가 발달된 수준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들을 기본적 자산으로 하여, 우선 생활 민주주의의 학습기반을 충실하게 건조하고, 정치 민주주의에의 참여와 비판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노력을 체계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실천하는 데 요구되는 조건과 환경에 있어서, 우리는, 적어도 아직, 세계 어느 다른 나라의 경우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있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