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 민주주의의 기반이 없는 정치 민주주의 그 자체,
그리고 국가, 조직체 등의 각종 공동체에는
성장과 번영을 기대할 수가 없다.

 -- 생활 민주주의는 공동체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바탕이다.

 --생활 민주주의의 내실과 성장은 일차적으로
교육의 책무에 속한다.

생활민주주의 기반(11)

공동체적 삶의 질과 생활 민주주의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자유 민주주의의 반추

민주주의의 개념과 원리는 발생론적 근원으로 보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에서 시작된 정치체제, 즉 한 사람의 군주나 소수의 통치계급이 아니라 국가의 구성원인 “민중”(demos)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여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제도의 구조적-기능적 특징이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재구성되면서 제도론적 체제와 가치론적 의미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정치 민주주의는 그 이름이 적용되는 체제로는 수없이 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적어도 명목상으로나마 거의 공통된 특징이라고는 “민중에 의한 통치체제”를 이름할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춘 수준일 뿐이라고 할 정도이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적 삶을 영위한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정치적(제도적) 민주주의의 체제와 역할에 의존한 삶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왜 양심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듯이, 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적-현대적 개념의 민주주의란 모든 공동체적 삶의 규범적 원리이며, “좋은 삶”의 조건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화제나 논제로 삼는다면, 어떤 민주주의를 말하느냐를 물어야 할 정도로 난맥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틀에서,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개방적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국가적 차원의 통치제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군집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의 양식”이라는 범주로까지 관심의 외연을 확장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미론적 논의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군집”(群集)의 요소인 구성원이 본질적으로 어떤 성격의 개체인가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단순한 물리적 군집상태는 “사회”나 “공동체”의 개념을 적용할 대상이 아니다. 그냥 물리적 실체일 뿐이다. 사회나 공동체의 구성원 간에는 어떤 의미의 형태로든지 “관계의 개념”이 성립되어 있어야 한다. 대체로 관계의 개념으로서는 세 가지가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유기적”(organic) 관계, “기계적”(mechanic) 관계, 그리고 “연합적”(associative) 관계가 그것이다.

유기적 관계는 군집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각기 다른 요소와의 관계를 자체의 (내적) 속성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구성요소들은 각기 “본질적으로” 유기적 관계의 속성으로 인하여 전체와의 관계를 이루는 특징이 있다. “내적(internal) 관계설”이라고도 하고 “사회 유기체설”이 그것이다. 기계적 관계에 있어서 군집의 요소들은 각기 독자적 실체로 존재하되 다른 요소들과 “우연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외적(external) 관계설”이라고도 하고, “사회 계약설”이 그것이다. 연합적 관계는 군집의 요소들이 원자적 개체와 같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만 다른 개체와 서로 연합함(associated)으로써 결국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사회 연합설”이 그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위의 세 가지 학설로써 설명되는 공동체의 구성요소(개체)들이 각기 관계적 특징에 있어서는 개체적 의미와 가치의 무게는 다르지만, 개체적 자유의 실체로서 사회적 존재의 목적론적 존엄성을 중시하고 있다. 즉, 개체들은 각기 그 존재론적 의미와 가치에 있어서 본질적이며, 다른 실체를 위한 도구이거나 부속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정체성(identity)을 지닌 개체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자유와 평등 등의 기본적 가치도 이러한 맥락에서 존중되는 체제이다. 자유 민주주의의 개체들은 공동체의 구성요소들이지만, 각기 정체성과 존엄성을 보장받는 존재로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

설명하는 관점과 방식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개체들은 개성이 존중되고 가치선택이 자유로우며 서로의 사회적 관계를 통하여 성장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된 체제가 자유 민주주의이다. 자유는 구속이나 제재가 없는 소극적 의미로만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가치지향적으로 선택하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적극적 의미로도 이해된다. 그러므로 민주적 방법에 의하여 제정된 규칙에 의하지 않고는 모든 공동체적 구성과 활동에서 주어지는 제도적 안전의 보장과 공민적 의지의 실현과 복리적 기회의 선택에서 부당한 차등이 있을 수 없다. 공동체 자체의 성장도 구성원의 성장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며, 모든 구성원이 각기 성장의 삶을 유지하고 또 한 이를 진흥시키는 생태적 특성이 바로 공동체의 성장 척도가 된다.

일상적 생활상황과 민주주의

개체적 존엄성과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서 여러 가지의 기본적인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받는다는 것은, 정치-제도적 맥락에서만 아니라, 구성원들이 관계하고 계약하고 연합하는 모든 상황에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산업, 학문, 예술, 스포츠, 교육 등을 포함한 모든 제도적 조직에는 물론이고, 신앙생활, 여가활동, 이웃관계, 교우관계, 지역사회 등의 공동체 생활상황 어디에도 민주적 생활 원리는 적용될 수 있고 그 의미를 지닌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있고, 자유로운 의사의 표현이 있으며, 각기 추구하는 이해관계가 있고, 욕구충족의 동기가 있으며, 발전적 대안의 선택이 있다면, 거기에는 가볍고 무겁고 간에 갈등적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민주적 공동체가 반드시 순조롭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임의적 세력과 강제에 의한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보다도 분명히 정신적 해방감과 신체적 안전도 누릴 수 있지만, 다원주의적 기조 위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갈등의 양상은 권위주의적 체제 하에서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각한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자유민주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항상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특성 그 자체로 인하여 혼란과 갈등을 수시로 경험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갈등을 전제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방법적 원리를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방법적 원리로는 합리적 입법과 준법을 비롯한 규칙의 제정과 관리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뿌리내린 문화적-윤리적 바탕, 예컨대 관용과 배려 등의 덕목을 실천하는 풍토도 요청된다.

정치적-제도적 민주주의의 경우에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규칙은 반드시 진리와 허위의 판별, 정의와 불의의 규명, 다수와 소수의 지지, 합리성과 불합리성 등과 같은 “인식적 판단”(epistemic judgement)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생활 민주주의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 공동체의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 관습, 관행 등의 문화적 요소가 더욱 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부모가 물려 준 재산을 자식의 형제들이 유산으로 받아 분배하고자 할 때, 상속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처리하는 수도 많지만, 형제들의 각각이 지닌 형편과 사정을 고려하여 임의로 정한 배려적 규칙의 합의에 의하여 차등적 분배를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비민주적이라고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생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공동체적 구성원이 서로 인격체의 존엄성을 평등하게 지켜주고, 의견, 의지, 선택 등을 공정하게 존중해 주며, 함께 공동체의 안위와 복리의 증진에 협력하는 분위기라고 할 수도 있다. 때로는 경쟁도 하고 견제도 하며 대결도 하지만, 공정한 기회의 관리를 통하여 공동체의 성장에 참여하는 생활의 양식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대립과 갈등은 경험의 사례마다 새롭게 발생하는 특징을 서로가 학습하기도 하고, 서로가 모두 성장의 장에서 “경험의 재구성”을 이어가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의 고질적 안정은 성장을 정지시키고 침체상태에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생동감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가 붕괴하면

그러나 민주주의는 옛날 플라톤이 지적하였듯이 화려한 다양성의 색채 속에서 전문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무모한 독선자가 지도자적 위치를 탐하여 서투르고, 무례한 방법으로 우중(愚衆)을 혼란시켜 선동하면 공동체는 무너지고 만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어지러운 세태를 바로 잡기 위하여 독재자가 출현하고, 동시에 모든 사회적 질서는 전복되어 버릴 수가 있다. 실제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현상의 사례는 여러 나라의 역사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특히 자유 민주주의의 유지와 성장은, 민주적 가치에 대한 충실한 학습, 이에 일관된 규범에 따른 기본적 습관, 그리고 갈등적 상황의 해결을 위해 발휘할 지력의 증진은 학교제도의 교육에서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표적에 속한다. 우리 교육에서 1972년 이래 지금까지 각급 학교의 도덕교육을 교과로 설정하여 시행해 왔으나, 민주적 시민의 자질에 관한 교육은 덕목의 내면화를 단편적으로 가르치고, 도덕적 지식의 학습을 중심으로 교과를 운영해 온 정도였다. 돌이켜 보면, 실제로 우리의 젊은이나 국민 일반이 익혀야 하는 이론과 실천의 학습내용은 생활 민주주의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하여 정치적(제도적) 민주주의의 이해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어야 했다.

 

-- 다시 천명하건대 --

<> 생활 민주주의의 기반이 없는

정치 민주주의 그 자체, 그리고 국가, 조직체 등의

각종 공동체에는 성장과 번영을 기대할 수가 없다.

<> 생활 민주주의는 공동체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바탕이다.

<> 생활 민주주의의 내실과 성장은 일차적으로

교육의 책무에 속한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