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으로 개방된 민주주의에서 혼란을 관찰하게 되고, 극단적으로 경직된 평등주의에서 독재가 요청된다. 극악의 상태로 말하면, 자유는 혼란을 가져오고, 평등은 독재를 정당화한다.

< 생활 민주주의 기반 (12)>

민주적 자유인과 교육적 평등성의 포괄적 이해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여신상

비속한 자유와 혼미한 평등

정치적 문제로서나 일상적 생활에서나,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서 생각하고 논의하고 행동하는 상황에 있을 때, 적어도 우리는 기본적인 원리로 자유의 가치와 평등의 규범을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민주주의의 제도나 생활의 양식은 자유와 평등의 두 가지 기본적인 이념 혹은 가치에 바탕과 기준을 두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관점이나 맥락에 따라서 어떻게 달리 설명되고 이해되든지 간에,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상정하는 논리적 조건이기도 하고 규범적 전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 두 개념을 단순한(소박한 혹은 비속한) 방식으로 정의하면, 자유는 제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평등은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두 개념은 이해의 방식과 심도에 따라서 논리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서로 분리된 범주에 속하기도 하고, 서로 의미 있게 관련된 상태에 있기도 한다.

실제적으로 이런 상황은 없겠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두가 서로 완전한(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는 상태에 있다면, 평등은 완전히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경지에 있게 된다. 아무런 제재도 구속도 없는 상태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어디에도 견주어 봐야 할 데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 평등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맥락에서 서로가 다소간 의존해야 하는 관계, 즉 서로 제재를 받거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게 되면, 그만큼 자유의 수호자들은 서로 충돌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들은 구체적인 평등의 규범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적어도 자유와 평등의 사이에는 개념적 특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어 준다. 일반적인 의미로, 자유는 제약의 규칙만큼 제한당하고, 완전한 자유는 아무런 제재가 없을 때 기대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자유는 제재가 없는 상황만큼 누릴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평등은 아무런 제약이 없어도 자연적으로 충족되는 그러한 성격의 개념이 아니다. 평등의 개념은 특성상 누군가의, 혹은 “편견 없는” 제3자적 판단의 권위를 요청하는 규범이다.

그러므로 자유만으로는 공동체 구성원의 판단과 행동에 충돌과 갈등이 따르게 되고, 평등을 지향하는 제도적 힘의 작용만큼 자유는 제한당하게 된다. 최악의 상태로 보면, 완전한 자유는 혼란의 극치를 보게 하고, 완전한 평등은 독재의 지배를 요청한다. 극단적으로 개방된 민주주의에서 혼란을 관찰하게 되고, 극단적으로 경직된 평등주의에서 독재가 요청된다. 극악의 상태로 말하면, 자유는 혼란을 가져오고, 평등은 독재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위의 설명과 같이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고지식한 이해방식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적당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선의(善意)의 독재”라고 하여 혼란을 방지할 정도의 제재를 합리화하는 소리가 있고, “제한적 자유”라고 하여 적어도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규칙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의”나 “제한”이라는 말은 막연한 표현이다. 주장하기에 따라서는 그 정도가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는 다른 시각에서 좀 더 세련된 사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격적 자유”는 내재적 통제상태

성장하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민주적 삶을 영위하도록 교육하고자 할 때, 자유의 원리를 제대로 행사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사고와 습관을 가르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도덕적-사회적 개념인 자유는 일반적으로 어떤 임의적 힘에 의한 구속이나 제재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어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목표나 생활방향을 선정할 수 있고, 자신에게 허용된 많은 것 중에서 취사선택이 가능하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어떤 개인이나 권위에 의해서도 강요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의 자유는 “...에서의 자유”를 뜻하며, 흔히 “소극적 자유”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단순히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 주어지는 구속 혹은 제재가 없음을 나타내는 소극적 의미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다. “...에의 자유” 혹은 “...을 위한 자유”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적극적 자유”의 의미로도 이해될 수가 있다. 소극적 자유는 행위자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로 설명되지만, 반대로 적극적 자유는 행위자가 어떤 충동, 의지 혹은 소망을 실현코자 하느냐로 설명된다.

적극적 자유는 인간 의지의 작동과 더불어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단지 인간의 자연적-본능적 충동에 내맡긴 자신의 만족을 위한 자유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의미 있는 목적이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 혹은 달성하는 수단을 성립시키려는 자유이다. 충동은 우리가 의식하든지 않든지 간에 생리적 과정으로 발동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의지나 원망과 같이 일관성을 지향하는 의식적이고 목적적인 성향은 아니다. 그러므로 충동은 오히려 인간의 자연적 속성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물론 이 말은 충동이란 반드시 우리의 선택적-반성적 결단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지와 원망과는 달리 스스로 “‘입법한” 규칙에 의하여 어떤 목적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심리적 작용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통제되지 않은 충동의 실현은 사회적 상황에서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개인 생활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자유가 아무런 통제도 없는 충동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개념의 자유는 인간 생활에 거의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충동의 노예로서의 인간에게 자유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논할 필요가 없다. 그는 오히려 “진실된 자아”와는 구별된 어떤 힘에 의해서 구속되어 있거나 통제되고 있다. 충동의 해방으로서 자유는 인격적 개념이 못된다. 도덕적-인격적 개념으로서의 자유는 오히려 유목적적 인간 생활에서 충동이 어떤 설정된 목적과 방향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 입법한 자기통제의 원리에 따른 행위를 자유로운 행위라고 한다면, 이러한 의미의 자유는 ‘자율성’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물론, “자율”과 “자유”는 비슷한 용어이기는 하지만, “자율”은 일차적으로 행위의 과정을 특징짓는 데 비하여, ‘자유’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상황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율성” 혹은 영어의 “autonomy”는 본래 개인에게 적용된 말이 아니라, 국가 혹은 특정의 조직체에 적용된 말인 것 같다. 그러나 플라톤(Platon) 이래 ‘자율성’이라는 말은 은유적으로 개체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해 왔다. 우리가 그것의 본래 용법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 파인버그(J. Feinberg)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이해에 도움이 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식민지일 때, 전자는 독립을 얻기까지는 자유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한때 타국의 통치하에 있다가 지금은 스스로 통치하게 된 국가가 있다고 하자. 이 경유에 자유와 독립과 자치(혹은 자율)는 같은 뜻을 나타낸다. ... (그런데) 그 자유국가는 시민에게 거의 자유(무통제)가 허용되지 않는 지독한 전제적 국가일 경유도 있다. 자주 통치는 타국의 지배보다 훨씬 더 억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국가는 여전히 자주독립의 국가이며, 또한 자유국가이다. (Joel Feinberg, Social Philosophy. Englewood Cliffs, New Jersey : Prince-Hall, 1973, p.15.)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개인의 자유도 자신이 스스로 통제하고 있을 때, 즉 스스로 허용하지 않은 어떤 외적 통제에 지배되지 않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즉, “갑”이라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의 결정에 있어서는 “을”이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말하자면, 그것에 관한 한 갑은 스스로 을의 지배하에 있고자 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갑을 일컬어 을의 조종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결정을 행사하지 못하며, 또한 자유로운 행위자가 아니라고 평가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자기통제의 최고원리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이므로, 그는 여전히 자유로운 인간이며 또한 자율적인 행위자이다. 즉, 을의 결정을 따르기로 한 것은 갑 자신의 결정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적어도 인격적 자유는 아무런 제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즉 통제의 권위와 원리가 자신의 의지에 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육평등의 네 가지 차원

평등의 개념은 자유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다. 한 나라의 국민이면, 국가의 법에 따라서 누구나 생명, 인격, 재산, 명예 등에 있어서 평등하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정치, 경제, 학습, 언론, 출판, 주거, 집회, 결사, 이동, 신앙 등에 있어서 기회는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하며, 각종의 선거, 납세, 국방 등에 요구되는 부담을 평등하게 이행할 의무가 있다. 특히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인 국민에게 주어지는 각종의 권리와 기회와 부담에 있어서 평등의 규칙은 매우 복잡하게 주어진다.

“평등의 개념”은 주어지는 권리, 기회, 부담의 성격에 따라서 설명의 논리가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다. “평등”은 대체적으로 “동일성(sameness)”을 나타내고, 때로는 “적합성 (fittingness)”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가끔 “공정성(fairness)”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위의 세가지 경우들을 포괄적으로 일컬어 “평등성(equality)”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한 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sameness는 equality, fairness는 equity로 구별하고 주로 동등성과 공정성으로 각기 번역되기도 한다.)

어느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전교생으로 하여금 정해진 교복을 입게 한다고 하자. 교복의 제정은 학생들로 하여금 적어도 교내에서나 등하교 시간에 같은 디자인의 제복을 입도록 하는 규칙이다. 대체로 긍정적 평가는 이러하다. 교복을 입으면, 학생들은 학교생활에서 빈부의 차이에 따라서 나타나는 천차만별의 복장을 입음으로써 오는 위화감을 방지할 수 있고, 학교밖에서 학생 신분이 노출되므로 사회일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에 지도가 용이하므로 청소년 시기에 발생하는 일탈행동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교복은 “평등의 개념”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학교 당국의 측면에서 보면, 학생들로 하여금 똑같은 디자인의 교복을 입게 한다. “동일성”의 개념을 충족시켜야 한다. 둘째, 학생의 측면에서 보면, 교복은 각자의 몸에 맞아야 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아야 하므로, “적합성”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동일성과 적합성의 경우에게는 별로 문제가 없을 것도 같다. 학교 당국이 바라는 학생들의 동일성은 교복의 필요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학생 각자의 편에서는 자신의 취향까지를 주장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체격에는 맞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셋째, 교복의 대금을 부담해야 하는 학부모의 차원에서 보면, “공정성”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한다. 넉넉한 집의 부모에게는 어려움이 없겠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자유 복장과는 달리 별도의 부담을 새삼 안게 된다. 그러므로 교복의 가격은 적정해야 하고, 그래도 문제가 발생하면 별도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 학교가 교비로써 대납하거나, 어떤 독지가의 지원을 받거나, 아니면 전체적인 주문과정에서 극빈 가정의 자녀들의 비용을 일반 학생들의 부모들로 하여금 분담케 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이 경우에 학교나 학부모 단체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평등교육(혹은 교육적 평등성)에 관한 논의나 논리적 구조는 다른 사회적 가치의 경우보다도 훨씬 복잡하다. 예컨대, 경제적 가치의 분배는 비용(돈)으로 계산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되고, 정치적 가치의 경우에는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의 부여, 혹은 정치적 의사표시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해결될 수도 있다. 다른 사회적 가치들의 경우에 분배에 따르는 평등의 문제는 대체적으로 주어진 기회의 공정성 등으로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물론, 교육적 가치의 분배도 경제적 가치의 경우처럼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의 분배를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정치적 가치의 경우처럼 사회적 기회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교육적 가치의 분배는 소요되는 비용이나 제도적으로 창출되는 학습의 장(기회)을 중심으로 완전한 설명을 하기가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교육의 기회(혹은 학습의 장)는 무엇인가를 학습하는 기회의 장을 제공받는 상태에 있다고 해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 즉 취학상태에 있다고 해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 교육의 기회(혹은 학습의 장)는 학습자의 성장에 유의미한 것, 즉 실제로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상태에 있어야 하고, 학습자의 성장에 기여하는 경험의 장이어야 한다.

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관리한다는 것은 주어지는 교육적 경험의 “동일성”만이 아니라, 학습자의 성장에 유의미한(즉, “적합성”을 지닌) 경험의 장이 “공정성”을 만족시키는 운영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의미한 학습의 장은 학습자에 따른 성장원리의 다양성과 성장력의 개별성이 충족되고 있을 때 기대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특히 교육적 평등의 개념은 교육 프로그램의 “동일성”만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며, 교육의 대상 즉 학습자에 대한 개성적-인격적 특성에 대한 “적합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학습의 장은 “공정성”을 바탕으로 하여 운영되고 관리될 때, 비로소 가장 포괄적인 의미의 교육적 평등이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