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의 매체가 정보의 기계적 학습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성과를 보일 수가 있으나, 예지적 학습에서는 그 성과가 크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덕적 품성에 관한 한에서는 관련된 정보의 학습과 지식의 개발에서 다소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교사나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역할도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 인공지능과 교육의 향방 >

인공지능과 교육세계의 변화(3)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우려와 기대의 혼재

며칠전 신문에 이런 내용으로 실렸던 기사가 있다. 여러 대학에서 교수들이 학기말 과제물로 학생들에게 요구한 내용이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드러나는 사례가 많아 대책을 세우는 분위기가 있다는 기사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미국, 영국, 카나다, 일본,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대학과 중등학교의 교원들은 학생이 제출한 과제물에서 ChatGPT를 사용한 흔적이 많아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보도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는 그냥 방치하거나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아직은 그 대세로 보면 여러 나라의 교육계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이에 대응하는 방침을 세우는 추세가 지배적이다.

문제는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 중에는 자신이 창의적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ChatGPT에서 표절하여 작성한 부정직한 제출물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출물에 제대로의 성적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 교원들의 반응이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 ChatGPT가 학교의 교육질서를 어지럽게 한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대응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착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에도 이에 따라 발생하는 부담으로 인하여 정보사용의 빈부격차를 발생시킨다는 우려도 있다. 또 한 편으로는 잘 활용하기만 하면 오히려 지식의 전달과 학습과 사용에 있어서 과거에 없었던 생산적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그리하여 인공지능의 활성화를 위하여 묵인, 수용, 권장 등의 다양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교육계의 부정적 대응은 대체적으로 전통적 교육관에서 볼 때 정직하지 못한 행동인 표절이 만연함으로써 그 자체가 비교육적이라는 것, 학교와 교사의 전문적 지위를 위협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는 것, 나아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학교제도 자체의 존속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우려할 점들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정보체제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적극성과 적응력이 젊은 학생들에 비하여 저조한 교원들은 자신이 전문직적 권위를 상실케 된다는 위기의식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교육과 학습에서 요구되는 지식의 전달과 확산과 가공을 위한 작업을 담당해 주는 매체가 제공되었다는 것은 지식의 학습과 산업에 놀라운 발전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예측을 허용하고 있다.

이미 21세기로의 세기적 전환 시기에 두드러진 사회적 특징의 하나는 정보화의 추세가 가속적으로 진행되고, 이와 함께 지식기반의 사회가 본격화된다는 전망이었다. 지식과 정보의 가치와 의미는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그러나 아이로닉하게도 지식의 전수와 생산의 요원을 양성하는 전통적 전문직인 교사와 교수는 오히려 그 전문성을 위협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식과 정보는 단순히 보존되고 전수되는 대상이 아니라, 사용되고 가공되고 재창조되면서 폭넓게 급격하게 확대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변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지식의 세분화와 재구성이 동시에 진행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지식과 정보에 관련된 분화현상은 전통적인 포괄적 전문성보다는 세분화된 분업적 특수성의 수요가 높아진 결과이기도 하다.

지식과 정보의 전수, 생산, 사용, 가공 등의 요구는 매우 복잡하고 가변적인 데 비하여, 특히 초.중등학교는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기도 어렵고, 또한 그 전통적 정체성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주로 보통교육에 종사하는 교원들의 전문성은 과소 평가될 수도 있다. 그리고 대학의 교원들도 분야에 따라서 전문인력의 수요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함에 따라서 흥망을 예상하기가 어려운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교수-학습의 기재가 준 영향과 평가

인공지능을 통한 학습에 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잠깐 행동분석적 방법에 의한 교수-학습의 원리를 참고삼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일종의 정보매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1960~70년대에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에서 지식의 학습이나 행동의 변화를 수업목표로 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원리를 개발하여 활용한 시기가 있었다. 흔히 “프로그램 학습”(programmed instruction)이라고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학습”이라고 한 학습지도의 원리에 관심이 고조된 때가 있었다. 지식의 학습과 산업에 있어서 오늘의 ChatGPT 만큼의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교수-학습의 활동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끝없는 발전을 예고한 것이었다.

관심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교수-학습의 목표를 행동적 언어와 원리로 진술하고, 관찰가능한 학습자의 변화와 학습목표의 달성을 체계적으로 프로그램화하는 방법이다. 지금도 여러 형태의 교육현장에서 실천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설정된 교수-학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세밀하고 체계적인 행동적 분석과 학습과정의 계획이 가져 온 성과는 실로 대단한 가시적 성과였다.

이 방법의 전문가들이 주장하기로는 특히 교육현장의 수업목표를 행동적 개념(언어)과 원리로 분석하고 체계화할 수 있다면, 학습자들의 능력수준의 차이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학습자들을 상대로 동등한 교수-학습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도 설명하였다. 실제로 이 원리에 의해서 “수업기계”(teaching machine)가 만들어지고 학교현장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당시에 발달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영향과 성과이기도 하였다.

원리 자체의 과장된 성과라기보다는 여기에 중요한 단서가 있음을 읽을 수 있다. “행동적 언어와 원리로 분석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교수-학습의 목표라면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다. 물론 열정적인 주도자들은 학교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학습활동의 목표들은 거의 이러한 방법적 원리에 따른 행동적 분석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만큼 성과도 올리고 학교수업을 개선하는 데 대단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1970년을 전후하여 미국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을 때, 그러한 원리로 계획된 학습심리학 강좌 하나를 수강한 적이 있다. 재미있는 현상의 하나는 그 강좌에 등록한 학생들은 모두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수강생 모두가 본래 각기 지닌 특별한 동기가 작용했다거나, 교수가 학점을 후하게 주었다거나 한 것이 아니다. 그 강좌의 성격과 목표 자체가 프로그램 학습법에 의하여 모두가 만족스러운 학습성과인 A학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즉 “완전학습”이 가능하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교수-학습의 성적은 목표에 따른 학생들의 성취이기는 하지만, 학생들의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크게 고도의 노력과 열정을 바치지 않아도, 교수가 기대하는 수준의 학습성과를 보여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결과는, 잘 만들어진 학습 프로그램이 학생들의 충분한 동기유발과 단계마다 적절한 수준의 성취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교수도 학생도, 그뿐만 아니라 그밖의 누구가 평가해도, 만족스러운 교수-학습의 성과, 특히 그 강좌에 기대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만큼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성적에 대한 긴장이나 집착 없이 필요한 만큼 충분히 공부하였고, 교수는 그 강좌에서 겨냥한 수준의 학습지도를 만족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일에 쓴 박사학위 논문의 한 부분에서 Programmed Instruction (PI)에 관하여 이렇게 비판적 논의를 한 적이 있다. PI에 의한 학습상의 성취는 그 자체로서 놀라운 결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교육에서 겨냥하는 목표는 정보나 지식의 획득 그 자체를 도우는 것인가, 아니면 학습자의 학습역량을 높이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PI는 지식 혹은 정보의 획득을 위하여 놀라운 성과를 보여 주지만, 성취한 것은 학생들의 탁월한 동기와 역량, 그들의 탁월한 지력이 작용한 성과라기보다는 프로그램 자체의 기계적 기능의 탁월성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점이다. 성취한 바는 탁월한 기계의 성취이지 학습자의 탁월한 지력의 성취는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학습의 과정에서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즉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편안하게 획득한 정보보다는, 크고 작고 간에 문제상황을 경험하면서 학습하거나 생산한 지식이 학습자의 인격적 구성과 바탕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냥 기계적인 반응의 형태는 그럴 가능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물론 무의식적 경지에서 어떤 작용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매우 우연적인 것이다.

학생들은 편안하게 많은 것을 재미있게 배울 수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정보나 지식을 획득하고 생산하고 가공하고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발휘되는 지력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동기와 역량이 인격적 요소로서 내면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이것이 더욱 중요한 교육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물론 우리가 학교에서나 일상에서 학습하는 정보나 지식은 단순한 도구적 성격을 지닌 것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뉴턴의 사과처럼” 특별한 계기나 의미를 지니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실용적으로 보면 일상적 생활에서의 단순한 습관화가 여러 가지의 지식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도구적 기능을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의미도 잘 모르고 외운 “구구단”이나, “태정태세문단세 ...”라는 조선왕조의 순서를 기계적으로 익혀두고 매우 요긴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편하고 요긴하게 사용하는 정보도 교육적으로 중요한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교육적으로 더욱 중요한 정보와 지식은 학습자의 전인적-인격적 성장에 영향을 주는 경험적, 학습적, 생산적, 그리고 다소의 문제적 상황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지력은 문제상황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수업기계나 ChatGPT의 기능은 지능도 아니고 기계적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지능이라고 한다면, 단지 그것을 발명하고 제작한 개인 혹은 단체의 지능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 의미를 다듬지 않고 사용해 온 “지식”과 “정보”에 관하여 약간의 의미론적 분석이 필요하다.

“지식”과 “정보”의 차이

우리말에서는 “지식”과 “정보”의 개념은 별로 엄격한 구별 없이 사용되기도 한다. “나는 그 사람에 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다”고 할 때의 “아는 바”는 문맥에 따라서 “지식”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도 있다. 나는 “일본경제에 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다”고 하면,일본경제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고, 이때의 “아는 바”와 “지식”은 같은 뜻이다, “정보”라고 바꾸어 쓰면 다소의 어색함은 있지만 크게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 흔히 영어로 “information”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서 “정보”라고도 하고 때로는 “지식”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며, 두 가지의 번역이 전혀 의미를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어의 경우에는 “information”과 “knowledge”는 분석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두 단어를 각기 우리의 편의에 따라서 “정보”와 “지식”으로 번역해서 설명하면, 두 단어 모두 앎을 뜻하지만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내가 가진 정보는 내가 누군가로부터, 혹은 어떤 방식으로 외부로부터 획득한 것이다. 나의(즉 내 마음의) 밖에서 들어온 앎의 내용은 엄격한 의미에서 모두 정보이다. 단순한 소식, 소문, 주장, 사상, 이론 등 그 어느 것이든지, 내가 생산한 것이 아니면서 외부로부터 획득한 것이면, “원천적으로” 정보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정보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소화한 상태에 있으면,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나의 지식에 속한다.

달리 표현하면, 정보는 외부로부터 내가 “기계적”(機械的) 학습을 통하여 획득한 것이다. 반면에 지식은 나의 마음이 지닌 일종의 “예지적”(叡智的, intelligible) 능력이 작용하여 스스로 생산하였거나, 아니면 수용된 정보가 예지적 능력의 작용으로 소화하여 사용가능한 정도로 인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정보이고 내가 사용할 때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정보는 효용성과 실용성으로 인하여 수용되는 기계적 학습의 결과인 데 비하여 지식은 이해력과 창의성으로 인하여 생산된 예지적 학습의 결과이다. 기계적 학습은 주로 암기력의 작용으로 정보를 수용하며 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생산적 효과를 위한 것이다. 이에 비하여, 예지적 학습은 사고력(혹은 문제해결력)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며 개별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여 원천적 지식을 생산한다.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의 매체가 정보의 기계적 학습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성과를 보일 수가 있으나, 예지적 학습에서는 그 성과가 크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덕적 품성에 관한 한에서는 관련된 정보의 학습과 지식의 개발에서 다소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교사나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역할도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 부록>

“교육받은 사람”의 이지적 평가체제

우리는 일상적으로 많은 정보를 소유한 사람을 “우수한(유식한)” 사람으로 칭하고,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열등한(무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을 소유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고, 그러한 능력이 부실한 사람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에 인격적 존재에 관하여 도덕적 평가를 할 때, 도덕적으로 세련된 사람을 일컬어 “유덕한” 사람이라고 하고, 취약하거나 방종한 사람을 “무례한” 사람이라고 한다.

정보의 소유를 중심으로 “우수함(유식함)”과 “열등함(무식함)”, 창의성과 문제해결력을 중심으로 “유능함”과 “무능함”, 도덕적 성숙성을 중심으로 “유덕함”과 “무례함”으로 구별한다면, 교육받은 사람들의 인격적 바탕을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8가지의 유형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단지 유의할 사항은 아래의 우수함(유식함)과 유능함, 그리고 유덕함의 구분이 있지만 상대적인 비교의 틀로서 의미를 지닐 뿐이며, 모든 사람을 어느 하나의 “셀”에 배치해 버릴 수는 없다는 점이다.)

지식을 소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도덕적 품성을 갖추는 것을 “교육받은 사람”이 지니는 이지적 범주의 세가지 요소라고 보고, 다음과 같이 상대적 비교의 틀이 적용될 수 있다. (여기에 신체적 특성은 포함하지 않았다)

         <유형>  지식과 정보   /  문제해결력  /   도덕적 성숙성          

         (1)   우수함  /  유능함  /   유덕함             (유식하고 유능하며 어진 사람) 

           (2)  우수함   /  유능함  /   무례함          (유식하고 유능하되 교활한 사람)

           (3)  우수함   /  무능함  /  유덕함           (유식하되 무능하지만 좋은 사람)

           (4)   우수함  /  무능함  /  무례함        (유식하되 무능하고  부도덕한 사람)

           (5)  열등함  /  유능함   /  유덕함            (무식하지만 유능하고 착한 사람)

           (6)  열등함  /   유능함  /  무례함        (무식하지만 유능하되 무례한 사람) 

           (7)  열등함  /  무능함  /  유덕함            (무식하고 무능하지만 착한 사람) 

           (8)  열등함  /  무능함  /  무례함             (무식하고 무능하며 무례한 사람)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