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갑진년은 “약무교육 시무미래(若無敎育 是無未來),” 즉 ‘교육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는 말이 우리 교육의 화두가 되어야 할 이유다.

                                                                 교육학 박사 한기온
                                                                 교육학 박사 한기온

  2024년 새 학기를 준비하는 2월이다. 다시 우리 교육을 생각해본다. 미래 교육의 키워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또 학교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 그 변화를 위해 각 구성원들은 어떻게 기능해야 할까. 21세기 교육은 '인성''창의성'이 키워드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가야 한다. 교육부도 이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 두 가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다.

  인성교육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선성(善性)을 회복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인 이상, 인간을 위한 교육의 지향점이다. 특히 미시교육에서 이를 구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문제다. 이런 인식의 바탕 위에서 학교의 교육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성교육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교육활동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대정신과도 같이 가야 한다. 시대정신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내면적 정신이다. 이 말은 각 시대의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거나 당위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한다. 예컨대 군사독재 시대에는 민주화가 시대정신이 될 수 있었다. 시민에 의한 혁명이란 목표와 지향점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화의 당위성을 그대로 지지해주는 정신으로 가능한 것이다.

  시대정신이란 언어적 의미가 함의하듯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과도 상호연관성을 갖는다. 이런 연결성으로 상호 간 영향을 주고받으며 시대정신으로 나타난다. '귀족에서 시민으로', '수직에서 수평으로', '비민주에서 민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변화됐다.

  이러한 변화가 결과적으로 현재의 인문 정신으로 이어졌다. 인문은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는 일과 관련이 깊다. 이 말은 인권, 개성, 다름과 차이 등으로 치환할 수 있다. 인간은 단순히 먹고 입고 배설하는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서는 존재다. 먹는다면 왜 먹는지, 입는다면 왜 입는지, 이런 의미를 생각하고 이런 활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인문적'인 것이다.

  20세기까지는 효율성의 시대였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효율성이란 것으로 재단되고 평가되었다. 이런 패러다임은 전형적으로 산업혁명에서 발아된 것이었고 물질적 삶을 향상시키는데 목표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시대가 물질의 시대였다면 오늘날 인문의 시대는 정신적인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는 의미다.

  세기가 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동반하게 되며 그 패러다임의 변화가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방향성으로 이어진다. 교육은 말할 것도 없다. 시대적인 상황과 패러다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현재 이루어지는 교육의 모습과 방법이 과거와 다른 것도 이런 이유다. 교육에서의 패러다임 변화는 단순히 교육내용 방법, 목표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의식의 변화를 통해 사회가 변화되게 하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교육이 비판받는 것도 시대정신을 잘못 읽었거나 특정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교육은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거나 어떤 인간을 만들 것이냐의 문제를 뛰어넘는 활동이다. 궁극적으로는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핵심적인 가치는 시대정신과 맞물려 그 위에서 발전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육과 시대정신은 씨줄과 날줄처럼 항상 같이 간다는 의미다.

  씨줄만으로 혹은 날줄만으로는 옷감을 짤 수는 없다.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다. 서로 대립하는 것 같은 씨줄과 날줄이 어떻게 짜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학교는 사()와 제()가 만나는 공간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제지간(師弟之間)이란 말은 씨줄과 날줄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교사만 있고 학생은 없는 학교는 없다. 학생만 있고 교사 없는 학교도 없다. 학생이 씨줄이라면 교사는 날줄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인성교육이 씨줄이라면 도구적 교육은 날줄에 해당한다. 인성이라는 씨줄만 있다면 학교는 삶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근대적인 의미의 교육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또 인성교육을 배제하고 도구적 교육에만 치중한다면 역시 제대로 된 교육으로 보기는 어렵다. 인성교육과 도구적 교육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학교는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또한 학교는 교사의 교권과 학생의 인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의 학교에서는 교권만이 존재했을 뿐 학생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자 즉 가르침을 받는다는 말이 의미하듯 항상 스승이 우선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좀 비켜난 얘기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사제 간이란 말이 지니는 배경과 의미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지만 서구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멘토(mentor)나 구르(guru), 혹은 마스터(master)라는 말이 있지만 이런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스승이란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현재 우리의 상황은 씨줄 하나, 날줄 하나만으로 천을 짜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씨줄과 날줄이 만나야 천이 만들어진다는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한쪽 실만 잡아당긴다. 앞서 지적했듯이, 씨줄과 날줄이 동시에 만나야 옷을 만들 수 있는 온전한 천이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촘촘하게 잘 짤 짜서 좋은 옷을 만들 것이냐 아니냐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2024년 갑진년은 약무교육 시무미래(若無敎育 是無未來),” 교육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는 말이 우리 교육의 화두가 되어야 할 이유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