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이 변화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는 것이고, 개혁하지 않고서는 발전 과정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는 조바심이 가히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시점에서는, 교육 또한 이러한 변화와 개혁의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즉각적인 만족과 현재의 관심사에 압도되어 과거와 전통에 대한 회피와 망각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현대사회의 풍조 아래서, 교육에서의 변화와 개혁은 그야말로 가장 화급하게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로 등장한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변화와 개혁의 요구는, 특히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개인적·사회적 필요와 결합함으로써, 전통적으로 교육(敎育)과 학교(學校)가 담당해 온 역할에 대한 불만감을 고조시키며, 지금까지 학교에서 가르쳐 온 교육내용에 대한 개편의 필요성을 증폭시킨다.

  종전과는 다른 근래의 큰 변화로는,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통합 교과의 시행과 디지털 교과서의 도입, 중학교 교육과정에서 진로교육의 강화와 자유학기제 실시,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필수교과의 축소와 선택교과의 확대 및 학점제 실시, 대학에서 인문교양 과정의 소멸과 직업교육 과정의 강화, 그리고 교육의 단계를 불문하고 인터넷과 첨단 기자재를 활용하는 새로운 수업방식과 교수법의 도입, 심지어는 수업 AI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변와 개혁은 말 그대로 우리가 교육 대변혁의 시대에 당면했음을 실감하게 한다. 교육에서의 이러한 혁신의 추세는 요즘 유행하는 말인, ‘학습자의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 ‘개별화된 학습’, ‘학습자 주도의 수업혹은 배움 중심 교육이라든가, ‘수요자 중심의 교육과정교육 혁신’, ‘학교 경영등으로 구체화 된 모습을 드러낸다.

  기존의 교육과 학교의 모습을 바꾸려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와 개혁의 추세는 노동과 유용성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교육관을 통해서, 그리고 이러한 교육관을 반영하여 개편된 교육과정을 통하여 점차 구체화된다. 현대사회의 교육관과 그 교육과정이 드러내는 특징은 무엇보다 <개인적·사회적 필요>라는 관점에서 기존의 교육과 학교의 성격을 새롭게 이해하고 규정하려는 점이며, 이로 인해 필요라는 관점에서 교육의 성격과 학교의 위상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필요>의 관점에서 학교와 교육의 성격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려는 새로운 교육과정이, 장차 타파하고 대체하고자 하는 <교육 본래의 성격><학교의 전통적 위상>이 무엇이었는지 먼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교육의 성격과 학교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규정과 급격한 변화가 야기하고 있는 부작용과 폐해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지만, <필요>를 앞세우는 새로운 교육과정이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인문교육>이라는 형식 아래서 우리가 이제껏 영위해 온 교육적 이상이 소멸하고 <학교 본래의 모습>이 말살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특히 근래의 교육 대변혁 과업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문제의식은, <학교와 교육 활동을 통해 이제껏 시행해 온 인문교육이 과연 어떤 것이었고,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었는가>, <학교와 교육 안에서 인문교육과 그 정신이 소멸하였을 때, 학교와 교사의 위상은 장차 어떻게 변모하겠는가>라는 사실이다.

  먼저 전통적인 인문교육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교육활동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살펴보자. 인문교육 본연의 성격은 근대 인문교육의 모태가 된 르네상스 인문학과 인문주의를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서양에서 인문교육(인문중등학교 교육)은 페트라르카를 위시한 일단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하나의 교육제도로서 자리 잡는다. 고대의 고전과 문화의 학습을 모토로 삼은 인문주의는, 학습자의 <교양과 덕성>을 향상하고 <문필력>을 함양하자는 교육적 이상을 내보였다. 이때의 인문교육은, <내용>의 측면에서는, ‘실용적인 직업교육과는 대비되는, 인간다운 심성과 탁월한 자아를 형성하자는 인문교양교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또한 <형식>의 측면에서는, 연구방법론과 논증 기법에만 몰두함으로써 빈약한 내용과 투박한 문체를 탈피하는데 역부족이었던 중세식 교육 방법을 지양하며, 언어와 문장 위주의 공부를 통해 바른 사고력과 수려한 문필력을 함양하고자 했다.

  인문주의에서 중심 교과인 인문학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itas)는 말 그대로 인간성 함양을 위한 공부를 가리킨다. 인문학이 중심이 된 인문교육에서 주목할 점은, 함양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장차 획득해야 할 후천적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인문주의자 피코 미란돌라의 저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1486)에는, 신과 종교에 예속된 중세의 인간관과도 다르면서도 개인과 사회의 필요를 앞세우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과도 다른, 인문교육의 근간이 되는 인간관이 제시된다.

  “다른 피조물의 성질은 제한되어 있고, 우리[삼위일체의 하나님]가 각자에게 준 법칙에 구속되어 있다. [인간]만은 아무 제한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너에게 맡긴 자유의지에 따라서 너는 네 본성을 형성해도 무방하다. (중략) 우리는 너희 인간들을 완전히 천상적 존재도 아니고 완전히 지상적 존재도 아닌 것으로, 불멸의 존재도 아니고 멸망의 존재도 아닌 중간자적이고 미결정의 존재로 만들었다. 그것은 네가 어떤 형태를 택하건, 선택의 자유와 명예를 가지고 너 자신의 창조자, 형성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는 최하의 피조물인 금수로 타락할 수도 있고, 숭고한 신의 영역으로 상승할 수도 있다.” (Pico Mirandola, 1948, pp.224-225)

  피코 미란돌라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결정된 존재인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자신의 판단과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존재이다. 미리 주어진 본성에 따라 이미 결정된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만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장차 금수로 전락하는가 혹은 신에 가까운 존재로 상승하는가는, 인간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다. 이때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창조할 자유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괜찮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행동할 때, 인간의 삶은 금수의 삶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금수와 같은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는 <도야(陶冶)와 형성(形成)>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인문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태어나는 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도야 되어야 할 존재다. 인간은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인간답다고 할 수 없고, 도야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교육받지 못해 도야 되지 못한 인간은 사실상 인간이라기보다는 금수와 구별되지 않는 존재이다. 교육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인간이 동물들보다 더 조야하고 야만스러운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점이 바로 인간에게 도야가 필요한 이유였고, 따라서 인문교육에서 교육은 바로 <인간성의 도야>를 의미했다. 인간은 심성의 도야와 조형(주형)’을 뜻하는 교육을 통하여 인간을 동물보다 더 저급하게 만드는 정서와 욕구들을 제어해야 할 의무를 지닌 존재였고, 가능성만을 지닌 채 태어난 인간성의 도야와 형성에 필요한 교육이 바로 <인문교육>이었다.

  요컨대, 인간다운 심성의 함양은 인간 각자에게 부과된 의무였고, 동시에 인문교육의 과제였다. 서구 교육사를 볼 때, 르네상스 인문주의운동 아래서 인문주의자에 의하여 전 유럽에 세워진 인문중등학교는 인간 도야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고, 인문교육은 바로 인간 도야의 과정(過程)’이었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