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생활 민주주의부터 익혀야 하는가?

 

이 돈 희 (서울대 명예교수)

  이 글은, 지난 202479일 대통령 소속 국가교육위원회가 주최한 제6차 대토론회(주제: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에서 이돈희 교수가 기조강연한 내용을 재정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편집팀)

 

선진국의 국민이 된 한국인

  지금의 우리나라 최고령층은 전형적인 약소국(弱小國)”으로 평가받던 나라에 태어나서 식민지 생활도 하고, 동족간의 전쟁도 경험하고, 혁명과 쿠데타, 그리고 독재정치와 사회혼란을 겪으면서 가난하고 무력한 후진국의 아들딸로 자라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 세대는 당시 세계 최빈국의 상황에서 어린 시절, 젊은 시절, 어른이 된 후에도 가난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80, 90년을 그렇게 보냈지만, 그 세대가 지금 선진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계 선진국의 대열에서 견제도 받고 흠모의 대상이 된 국민이 되었다는 것, 이제는 선진국의 국민,” 바로 그 성취의 영광스러움으로 보상받을 자격을 갖춘 국가의 국민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감격의 의미와 특징과 수준에는 세대별로, 개인별로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이제 우리는 그동안 모든 세대가 참여하여 이룩한 기적과 영광의 성취로 보상받는 국민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데 작용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끔 국제회의의 장에서 제기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최빈국의 수준에서 선진국의 수준으로 상승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 적어도 그 국민이 함께 추구하던 지배적인 가치관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에 바로 교육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과도하고 왜곡된 교육열은 사회적으로 종종 문제가 될 정도라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교육적 풍토는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문화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20세기의 후반기에 이르러 국가 간의 경쟁력, 특히 경제적 경쟁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으로 작용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세기적 전환기에 이르러 지식기반사회라는 개념이 적어도 경제부문의 경쟁자산이라고 언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로 말하면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경쟁력은 중진국 수준에 머물렀지만, 지식기반의 여건만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기반으로는 바로 전통적인 교육열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지식기반사회란, 경제부문을 비롯하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요구되는 지식을 생산하고, 가공하고, 활용하고, 교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가 생성되고, 또한 이러한 현상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재구성되는 현상이 지속성을 지니는 그런 사회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의 지식기반사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을 통하여, 혹은 교육을 중심으로 하여 일구어 가는 사회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식기반사회라는 말이 경제부문에서 많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의 현상이지만, 그러한 사회적 여건의 기본적인 바탕은 이미 한국사회의 교육열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었던 셈입니다. 지식과 기술의 결합, 지식과 기업의 연계, 지식과 삶의 질 등, 적어도 이 부문에 관한 한, 한국은 이미 선진적 경쟁력의 바탕을 형성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기반을 형성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실했던 국민적 과제, 민주주의

  “민주적 사회라고 하면, 그러한 사회는 특별한 가치가 실현되는 좋은 사회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어떤   사회를 일컬어 민주적 사회라고 하고, 어떤 가치체제를 일컬어 민주주의라고 하는가에는 명시적이고 권위적인 일정한 답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습니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심지어는 독재성을 띤 제국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도 모두 각기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거나, 심하게는 민주주의의 전형(典型)이라고까지 고집합니다. 각기 좋은 삶의 본형임을 주장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좋은 삶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분명히 민주적삶과 이를 더욱 진흥토록 하는 교육이 언급될 것입니다. 어떤 유형의 공동체에서든지 간에, 우리가 규정하는 민주주의는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존엄적 가치를 유지하고, 각기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가치의 선택과 성장의 삶을 일구어 가는 마당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의 조건에서는 자연스럽게 구성원의 다원적인 가치의 추구와 이에 따른 생활의 양식이 개방적으로 허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혼란과 갈등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적 혼란과 갈등적 양상은 어느 먼 나라에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심각하게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가치선택의 다양성과 개방성이 높은 사회일수록, 선택과 집착으로 인한 크고 작은 갈등들이 수없이 발생하고 또한 항시적으로 재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여러 유형 중에서 특히 자유민주적 노선의 체제는 자체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하여 이러한 부담을 가장 심각하게 안고 있습니다. 특히 자유 민주주의가 성격상 갈등과 대립 등의 문제가 전혀 없는 완전한 통합의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한 다원주의를 허용하면서도, 구성원 간에 문제해결의 방법적 원리와 규칙을 공유함으로써 이를 성공적으로 유지해 가는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방적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국가의 교육은 이러한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와 규칙을 함께 학습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지식과 습관과 방법을 특히 성장하는 시기의 세대만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를 가르치는 일에 관심의 비중을 높게 유지하여야 합니다.

 

생활 민주주의 개념의 요청

  민주주의의 이해와 실천의 습관에 있어서, 우리 사회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민주적 관심을 진작시키는 데 있어서 교육부문이 다시 선두에, 그리고 중심에 서야 할 상황에 있습니다. 이 일을 게을리하면 발전은 머물고 후진국의 대열에 우리는 다시 합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현직에 있는 교육자들만이 아니라, 현직에서 물러난 모든 교육자들도 기회가 닿는 대로 민주주의를 더욱 공부하고 가르치고 본을 보이는 생활을 열심히, 꾸준히 해야 할 과제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개방적 다원주의를 허용하는 민주적 공동체에서 정연한 질서를 유지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성원 사이에 이해관계로 인한 대립, 갈등, 혼란 등의 사회적 문제들이 어지럽게 발생하는 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그러한 혼란의 문제들이 전혀 없는 완전한 질서의 정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들을 어떤 독재적 혹은 권위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구성원이 제정하고 공유한 규칙 혹은 원리에 의하여 해결해 갑니다. 민주적 구성원은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그러한 규칙에 동의하고 내면화된 규범에 따라 생활합니다. 적어도 본연의 의미로는 이러한 사회가 바로 민주주의의 사회입니다.

  그러나 언필칭 민주적 사회에는, 민도에 따라서, 알게 모르게 왜곡되고 오해되고 변질하는 부분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인하여 극한적인 대립과 갈등이 어지럽게 발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빈번히 서로 담론하고 조정하여 이해의 방식에 있어서 함께 접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거칠고 혼란스러운 분쟁과 폭력적 갈등이 지속하는 경우도 수없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하는 이면에는 특히 민주주의의 개념을 주로 정치제도라는 구조적 틀에서만 규정하고, 그 제도와 함께 이루어지는 고식적 행태와 경직된 관행에 집착하는 사회적 풍토의 영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정치제도로서 설명되는 정태적 체제로만 아니라, 생활양식으로 이해되는 역동적 과정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측면의 상보적 접근은, 민주주의의 개념을 더욱 근원적으로, 포괄적으로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래에 정치적 제도의 개념을 정치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생활양식의 개념을 일컬어 생활 민주주의라고 약칭하여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생활 민주주의는, 다소 소박한 수준이기는 하였지만, 본래 정치 민주주의의 제도적 체제에 함께 내재하는 요소이기도 하였습니다. 국가 혹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제각기 구성원의 자격으로 정책의 결정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거나 주장할 수 있었던 점, 그러므로 다원주의가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구성원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조직의 입법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인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동료 구성원과 더불어 토론하고 협의하고 조정하고 협상하고 합의하는 등의 과정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적어도 공동체적 삶의 어디에서도 생활 민주주의는 그 의미를 지닙니다. 민주적 사고, 공정한 검토, 개방적인 토론, 상호존중하는 협의, 진지하고 준엄한 결단 등은 정치에 관해서만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모든 상황과 과정의 어디에서나 진행되고 등장합니다. 생활 민주주의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상황에서 요청되고 실천되는 일종의 구체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가족생활에서도, 교우관계에서도, 직장생활에서도, 과학자들의 연구활동에서도, 스포츠의 경기상황에서도, 군대의 작전현장에서도, 종교단체의 신앙생활에서도, 적어도 구성원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추구하는 가치와 제시하는 의견과 발휘하는 능력을 존중해야 하는 상황에서라면, 생활 민주주의는 언제나 당위적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 민주주의로 세련된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그들은 창의성의 실현, 비판적 검토, 집단적 지능의 활용 등을 포함하는 개방적 사고에 익숙해 있습니다. 문제상황에 함께 임하는 사람들과의 숙의과정에서 관용과 배려, 그리고 사심 없는 자성의 덕목을 유지하며, 평등, 공정, 정의 등의 도덕적 규범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바탕을 적극적으로 형성해 있습니다. 생활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로든지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교육, 특히 체계적인 학교교육으로 시작하여 모든 제도적 부문에 확산되게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풍토를 요청합니다.

  생활 민주주의는 어떤 수준의 공동체에서든지 간에 구성원이 서로 인격적-생존적 실체와 그 존엄적 가치를 가장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생활양식을 요구합니다. 특히 생활 민주주의는 우리 한민족의 단군신화를 담은 고기(古記)에서 이어져 온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사상과 정조(情操)까지도 현실적 정치제도와 일상적 생활 과정에 자연스럽게 융합할 수 있게 합니다. 민주주의는 제도적 체제의 경직된규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의 유연한풍토를 생성하는 기능적 바탕이기를 요청합니다.

  제도적 체제와 구조에만 집착하는 정치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경직성으로 인하여 자칫 집단적 갈등과 대립의 형태를 보이면서 선동적 세력과 배타적 독선의 작용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치명적 분열과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여 활성화된 생활 민주주의적 의식과 습관은 정치적 공동체의 합리적 공영과 성장을 촉진하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생활 민주주의와 실천 과제

  생활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인간사회의 안전과 번영을 기하고, 또한 개체 인간 각자의 최대한 자아실현을 위하여, 자유와 창의와 성장을 계속 증진토록 하는 교육의 장을 유지합니다. 개체별 잠재력과 가능성의 가치, 그리고 이에 따른 생애의 선택은 평등하게 존중합니다. 적어도 다음의 사항들은 충분히 숙의해야 할 항목에 속합니다.

<> 생활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부당한 억압과 차등으로 인하여, 혹은 선동, 회유, 위협, 기만, 편견 등의 불온한 세력의 작용으로 인하여 인격의 성장에 피해와 희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 생활 민주주의는 구성원으로 하여금 일상적 문제해결과 가치선택의 상황에서 과학적 (혹은 합리적) 근거에 의존토록 노력한다.

<> 생활 민주주의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개인적-집단적 이해관계로 인한 대립, 상쟁 등의 가치갈등은, 다수결 등의 기계적-형식적 규칙을 적용하기에 앞서, 서로 이해, 배려, 관용, 양보 등의 인본적 덕목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와 협의로 해결함을 우선한다.

<> 생활 민주주의에서 공동체의 삶을 위한 제도와 규칙의 제정이나 문제의 해결방안은 다수의 압력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있는 현실적 (혹은 가상적) 당사자의 개방적 동의와 자발적 준행의 가능성을 헤아려 결정한다. 구성원은 누구도 다수의 물리적 폭력에 의해서 희생이 강제되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 생활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 가치추구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의 경쟁은 정의로운 규칙의 공정한 적용을 보장받는다.

 

다시 함축해서 말하면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는 결코 싸움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수없이 많은 공동체의 어느 수준에서 언급되든지 간에, 먼저, 그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각기 추구하는 성장의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공동체 자체의 복리와 번영을 함께 증진케 하는 생활의 양식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교육적이어야 하고, 또한 교육은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