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식민지로 고통을 받았던 아시아 여러 국가들 중에 해방과 함께 영토가 양분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나라로는 조선이 유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1939.9.1.~1945.9.2.) 당시 끔찍한 생체실험(生體實驗)으로 악명을 떨친 일본군 제731부대의 지하 실험실을 중국이 발견했다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가 2023년 5월 25일 보도했다.

그곳에서 일본군 제731부대는 남녀노소 포로들을 상대로 해부 실험, 냉동실험은 물론 탄저균(炭疽菌) 등 치명적인 세균을 활용한 생화학 무기 개발 시험을 했다. 탄저균으로 발병하는 탄저병(炭疽病)은 내장이 붓고 혈관에 균이 증식하는 병으로, 소, 말, 양 등 초식 가축에 주로 발생하며, 사람에게 옮기기도 한다.

실제로 일본군 제731부대의 린커우(林口) 지대장(支隊長)으로 근무했던 사카키 하야오는 1956년 선양(瀋陽) 특별군사재판소 증언에서 일본이 항복(1945.8.15.)하기 몇 달 전 안다 기지에서 “극도로 잔인한” 생체실험을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은 비밀부대의 지도자들에게 면책특권(免責特權)을 부여하고, 전쟁포로와 남성, 여성, 어린이, 심지어 유아를 포함한 민간인에 대한 일본의 끔찍한 실험에 관한 사실을 미국이 무마했다.

하지만 1990년대 기밀 해제에 따라 공개된 미국 문서에서 일본과 미국의 ‘검은 뒷거래’가 드러났다. 문서에는 미국이 전범 국가 일본과 독일에 똑같은 면책특권을 부여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은 자국 영토에 대한 분할 통치를 전혀 받지 않았고, 독일은 영토 분할 통치를 받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1949.10.7.~1990.10.3.)되었다.

일본은 생체실험 결과를 대가로 미국에 전쟁범죄 면책특권을 요구했고, 미국은 해당 데이터를 미군 포트 데트릭 연구소(Fort Detrick Biological Weapons Laboratory)로 옮겨 냉전 기간 생물·생화학 무기 개발에 사용하며 일본의 전쟁범죄를 눈감아 준 정황이 확인되었다. (이상 원문 : 2023년 5월 30일자 MBN)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유럽에서는 독일을 분할시킬 것을 결의(1945.2.4. 얄타 회담)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분할시킬 예정이었다. 그런데 2차 대전의 일부가 되었던 태평양전쟁(1941~1945)을 일으킨 일본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분할되지 않았다.

일본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면책 요청과 설득에 따라 미국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용서한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지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일본을 분할 통치하려던 연합국의 의도도 실현되지 못했다. 도리어 미국이 한반도의 안정을 위한 신탁통치와 소련의 한반도 지배 야욕 차단을 이유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을 양분(兩分)하자는 제의를 하게 된 것이다. (1945.12.16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홋카이도 전역과 혼슈 일부의 분할 통치를 준비하고 있었던 소련은 한반도의 분할에 의한 신탁통치라는 예상하지 않은 미국의 제안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일본의 러시아 공격에 다리 역할을 하였던 한반도를 지배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대가로 러시아에 한반도의 55%(; 북한 전역)를 넘겨주게 된 것이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고 있었고, 이 회의의 최종결정안이 발표되기 전에 미국 UP와 AP 통신이 12월 25일자로 “번즈(James F. Byrnes) 미국 국무장관(재임; 1945~1947)이 러시아의 신탁 통치안에 반대되는 ‘조선 즉시 독립안’을 주장하라는 훈령(訓令)을 받고 러시아로 갔다.”는 내용의 기사를 타전(打電)하였다.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미국 기사를 받아 12월 27일자로 '소련은 조선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조선 즉시 독립 주장,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냈다. 다음 해인 1946년 1월 24일 소련이 타스통신(ТАСС)을 통하여 모스크바 3상 회담의 경과와 ‘한반도 신탁통치안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미국발 기사 내용이 의도적으로 조작된 오보(誤報)임이 밝혀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창하며 한반도, 동남아시아 그리고 만주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일본은 이러한 지역들을 모두 포기하였다.
대동아공영권은 쇼와 시대 일본 제국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고안되었다. 점령지의 아시아인들에게 동아시아보다 더 큰 영역에서의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의 문화적․경제적 통합이라고 선전되었던 개념이다.
대동아공영권은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일어난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구호 중 하나였고, 오늘날 대동아공영권은 대체로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괴뢰 정부를 내세워 지역의 주민들과 경제를 조종한 뒤 이를 제국에 이용하면서 내세웠던 구호였다.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일본이 식민지로 점령하고 있었던 아시아 여러 지역들을 포기함에 따라 본의 아니게 일본의 식민지 개발에 전초 기지 역할을 하며 가장 오랫동안 잔혹하고 비참한 고통을 겪었던 조선도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로 고통을 받았던 아시아 여러 국가들 중에 해방과 함께 영토가 양분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나라로는 조선이 유일했다.

처음부터 조선인 참여가 제한된 5년 신탁통치안을 제시하였던 미국은 신탁통치 기간 중에도 조선인의 정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려고 했다. 조선인들이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한반도 분할 통치라는 미국의 단호한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1945.4.12)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만(Harry S. Truman) 부통령과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번즈가 조선의 분단과 신탁통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한반도 신탁통치는 소련이 주장하였고, 미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언론에 전파하기도 했다.

일본의 생체실험 성과물을 미국이 활용하는 대가로 일본에 전쟁범죄 면책특권을 주고, 일본 영토 분할 통치를 기대했던 러시아에는 한반도를 양분하여 넘기는 일에 맥아더(1880~1964)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이러한 맥아더의 역할은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카이로 선언(1943.11.27)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 된다.

맥아더는 1945년부터 1년 동안 집정관(執政官)이 되어, 히로히토 천황 위에 군림하며,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에 대한 감시와 감독의 일환이었지만, 일본 면책으로 미국이 받은 반대급부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 국민은 그를 숭배하며 신격화했다.

분할 5년도 되지 않아 동족 간에 처절한 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한반도 분단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크게 후회하며, 인천 상륙 작전(1950.9.15)을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는 등 북한 탈환과 한반도 통일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으나, 중공군의 개입(1950.11)으로 간신히 남한을 방어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6·25 전쟁은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미국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을 키우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당시 맥아더는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장제스와 함께 중국 해안에 상륙하자는 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맥아더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 게 목표였던 반면, 트루먼은 "제한전쟁"으로서 전쟁은 시작된 곳에서 맺어야 하고,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의견 차이로 결국 맥아더는 6.25 전쟁 중에 해임(1951.4.11)되고 말았다.

1962년 10월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종필 전 총리와의 면담에서 맥아더는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만주 폭격을 주장"했으며 "한국 전쟁의 휴전에 있어서 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했다. (원문: 위키백과)





고구려의 최전성기 국토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한반도 양분 이후 남한의 면적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 전체 면적인 120만km2(추정)의 12분의 1에 불과하다. (그림: 야후)


1990년대 미국 기밀문서의 비밀 해제에 따라 자체적으로 드러난 일본과 미국의 뒷거래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제731부대의 지하 실험실과 이 부대의 생체실험 결과를 대가로 미국이 일본에 전쟁범죄 면책특권을 부여한 사실이 2023년 5월에 중국 언론에 의해 추가로 밝혀지기 전까지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한반도를 반(半)이라도 지켜내기 위한 불가피 선택으로 인식되었다.

2차 대전 막바지에 만주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몰아내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받은 연합국 소련은 만주 지역의 일본군을 몰아낸 데 이어 1945년 8월 13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8월 15일 청진시를 점령하였다. 그날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알고도 남진하였고, 이에 미국은 한반도 전체를 소련이 점령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38선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고,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기로 합의하면서 남북 분단(1945.8.26.)이 초래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러시아군대가 주축을 이루었고, 러시아군대는 항상 일본군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소련군이 계속 남진한 것은,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더 큰 굴욕감과 패배감을 안겨주려는 의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당시 소련은 연합국이 결정한 전범 국가 일본의 영토에 대한 분할 통치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은 이미 홋카이도 전역과 혼슈 일부의 분할 통치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지배에 대한 강한 야욕을 가졌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과거 한반도에서 일본과 자주 부딪히고, 부딪힐 때마다 패배했던 러시아가 한반도에서의 상호 전쟁보다는 한반도를 평화롭게 나누어 갖자고 일본에 제의한 적은 있었지만, 전범 국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련이 일본을 정당하게 통치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에 소련이 더 큰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소련에 북한을 넘겨준 후에도 소련의 북한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6.25 전쟁 후 중국이 사실상 북한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때에도 소련과 러시아는 북한을 강력하게 그리고 배타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생체실험 결과 등을 대가로 일본에 전쟁범죄에 대한 면책특권을 주었고, 일본을 분할 통치하기로 한 연합국의 의도를 미국이 무산시켰다. 나아가 소련은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조선을 신속하게 독립시키기를 원한다는 가짜뉴스까지 만들어 전파하면서 미국이 한반도 분할 통치를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55%를 소련에 서둘러 넘겨버린 것은, 소련이 일본을 분할 통치하자고 할 것이 두려워 소련의 요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인 조치로 생각된다.

소련의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점령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북한을 소련에 넘겼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은 카이로 선언이다.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화민국의 장제스 등이 대표로 참가하여 발표한 선언문에는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가 없다.”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로 선언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동맹국 소련이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대가로 한반도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생각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군을 몰아내달라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소련군이 한반도 북쪽 초입인 청진에서 일본군과 벌인 최초의 전투가 청진 전투였고,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하는 바로 그날 일본이 항복(1945.8.15.)했다.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알았지만, 과거 일본군에 당하기만 했던 러시아군이 중심이 되었던 소련군은 이번 기회에 일본군을 전멸하겠다는 각오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쫓아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남하하고 있다고는 하였지만, 소련군은 당시 한반도 북쪽 상단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을 이유로 소련군을 설득하여 자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군에게 한반도 전체의 55%에 해당하는 38도선 이북을 선뜻 넘겨주었다. 이러한 미국의 신속한 조치는, 소련군이 남하하는 위치로부터 멀리 떨어진 38도선까지 양보하여 한반도의 반이 훨씬 넘는 영토를 소련에 넘김으로써, 일본과의 거래도 지키고 일본 영토의 분할 통치도 막아주려는 미국의 사전 계획으로 풀이된다.

1)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고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가 없다.
2)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3)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驅逐)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조선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4) 이를 위해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올해(2025년) 7월 미국의 트럼프(Donald J. Trump)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을 재건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전범 국가 일본의 분할 통치를 막아 주기 위한 방편으로 무고한 한반도를 갈라놓았고, 그 결과 6.25 전쟁이 발발하여 한반도 전역이 재기 불능의 폐허가 되었다. 한국이 경제발전을 위해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 때 미국이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한국을 재건하였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미국의 한반도 분할 통치 결정은 매우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조치였다. 조선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전쟁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기에, 조선으로 하여금 신탁통치를 받게 하는 것은 지극히 불공정한 결정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식민지로 고통을 받았던 다수의 아시아 국가들 중에 조선이 가장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는데, 조선만이 영토 분할에 의한 신탁통치를 받게 하였던 조치 또한 지극히 불공평한 결정이었다.

순식간에 분단국가가 된 조선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세계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거칠게 대립하며 처절하게 싸워왔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은 분단 80년이 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동독, 서독보다는 한반도가 먼저 통일될 수도 있다는 미국의 레이건(Ronald W. Reagan) 대통령 등 일부 정치인들의 1988년 전후 예상과 달리 독일은 그 직후인 1990년에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과거 미국이 조선의 영토를 분할하여 러시아에 넘기는 심히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조치를 하였지만, 우리가 미국을 감정적으로 대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최근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관세로 세계를 엄청난 혼란과 고통 속에 빠뜨렸고,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에는 섬뜩할 정도의 협박을 하고 있다. 사전 양해 없이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을 무효화시키고, 국제기구인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트럼프의 관세 독재에 대하여 우리와는 다르게 대응하는 국가도 적지 않다.


트럼프는 G-7 국가이면서 미국과는 공동 방위를 하는 이웃 캐나다에 고율의 관세 폭탄과 함께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는 진심이 섞인 조롱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이에 캐나다 국민은 국가의 주권은 판매나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미국을 향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2025년) 2월 15일에는 미국과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시합 도중 트럼프의 높은 관세와 조롱으로 분노한 캐나다 선수들이 미국 선수들과 심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세계를 위협하는 트럼프에 질세라 시진핑은 미국 보란 듯이 세계 정복 야욕을 드러내며 주변 약소국을 노골적으로 흡수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푸틴은 선제공격을 하고서도 자신이 원하는 땅을 내어주지 않으면 휴전을 하지 않겠다는 압박을 하고 한다. 지금 국제사회에는 국가 사이에 협박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위협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미국, 중국, 러시아를 제외한 국가들은 약소국이 되어버린 느낌마저 들 정도로 세계는 3국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속에서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을 상대로 비굴하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국 지도자의 개인적인 자질, 성향, 언행 등에 의한 국가 이미지의 대외적 손상을 최소화하는 한편, 미국에게는 굳건한 동맹, 중국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웃이라는 인식을 주면서 치밀하고 안정된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한다. 미국은 한국 없이는 중국을 상대하기 어렵고, 중국은 한국 없이는 미국을 이기기 어렵다는 상황을 두 나라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하면서, 지속적으로 경제력과 군사력를 보강함으로써, 중국은 물론 미국도 한국을 무시할 수 없는 세계적인 위상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나라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외정책에 심한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최근 추세이다. 따라서 미국이든 중국이든 그 나라 지도자의 개인적인 특성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같은 시각으로만 미국이나 중국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이나 중국이라는 국가는 트럼프나 시진핑 개인이나 트럼프나 시진핑 정부(government)의 영원한 소유는 아니다. 미국 야후에는 올해(2025년) 전승절 행사에 관하여 중국에서 올린 시진핑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시진핑의 권력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중국에서의 트럼프가 시진핑이고, 미국에서의 시진핑이 트럼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두 위인은 자국에 대한 애국보다는 개인적인 욕심에 탐닉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이들 나라 지도자들의 자국에 대한 운영권이 끝나는 날까지 차분하고 현명하게 대응하며 일치단결된 노력으로 국력 배양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림: 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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