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빈국 시절 다른 국가로부터 엄청난 자금과 기술 원조를 받아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지만, 인민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은 채,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19895월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함으로써 중국-소련 사이의 오랜 대립에 종지부를 찍었다. -소 관계의 정상화는 한-중 수교(1992)의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소 관계를 정상화한 고르바초프는 19911225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하였으며, 소련의 핵무기 발사 시스템을 포함한 전권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Boris N. Yeltsin)에게 인계하였다.

 

소련의 붕괴는 대통령 사임 다음 날인 199112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142-Н 선언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선언문은 모든 소련 연방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 수립을 허용하는 안이었다. (이상 원문 : 위키백과)

 

중국은 아시아의 병자(病者)라고 불릴 정도로 낮은 GDP(국내총생산)와 실속이 부족한 경제로 최빈국에 속해 있었다. 197812월 등소평의 개혁·개방 제안 이후 중국의 대외적 개방이 이루어졌지만, 1989년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시 중단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소련 붕괴를 계기로 1992년 이후 다시 본격화되었다. 과거 중국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지원프로그램에 따라 미국, 일본, 한국 등으로부터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를 받던 국가였다.

 

6.25 전쟁 당시 맥아더가 인천 상륙 작전으로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북한 전역을 수복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중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연인원 135만명 이상의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여 남북통일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6.25 전쟁 후 한국은 객관적 재기 불능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일어섰고, 한반도를 유린하였던 중국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을 극심한 가난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한 OECD의 노력에 한국은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 부도의 외환위기 속에서도 중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멈추지 않았다. (통계 :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 정책연구 - 대 중국 사례를 중심으로 -)

 

일본이 중국 개혁개방정책이 시작된 1979년 이래 2018년까지 약 40년간 엔 차관, 무상원조, 기술협력 방식으로 중국에 ODA를 제공한 금액은 36조 원에 달한다. 20181025일 아베 총리는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였으며, 일본의 대 중국 ODA는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고 말했다. (원문 : 외교부)

 

늦은 산업화에 의해 선진기술이 부족하였고 경제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등소평은 경제개혁을 하려고 하였고, 소련 붕괴(1991)를 계기로 경제 개방도 급진적으로 나타났으나, 중국기업들은 낮은 기술력으로 외국기업들과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낮은 노동임금을 이용하여 외국 기업들로 하여금 많은 공장을 중국에 이전하게 하여 중국 국내총생산을 늘려 자본을 증식하였고, 선진기술과 설비를 가진 해외 기업들에게 합자법인(合資法人)을 필수로 하여 중국기업들이 해외기업들의 운영을 배울 수 있게 하였다.

 

저임금에 의한 외국 공장들의 대대적인 중국 이전으로 2010년부터 중국의 세계 명목 GDP(국내총생산) 순위는 2위가 되었고, 2018년에는 중국 경제 규모가 135천억 달러에 달했다.

 

197971일의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회 회의에 중외합자경영기업법이 발표되어 외국기업이 중국에 사업을 하는 경우 중국과 반드시 합자법인을 만들어야 하고, 외국기업이 선진기술과 설비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선진기술이 없던 중국에서 기술 근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등소평에 의한 시장사회주의 경제제도 도입 등의 개혁과 개방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여 구매력평가 기반의 1인당 국내 총생산(Purchasing Power Parity; PPP)202119,338달러(세계에서 72, 국제통화기금 자료)로 집계되었다. (원문 : 위키백과)

 

소련연방 해체(1991)로 중국은 소련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미국, 일본, EU, 캐나다, 호주, 한국 등 경제 선진 국가들의 막대한 공적개발원조(ODA) 덕분에 지원받은 자금과 기술을 기반으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과 경쟁과 대립을 반복하며, 세계를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려고 하고 있다. 특히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한국 등이 자국의 자본과 기술로 중국을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이들 나라들은 세계 정복을 꿈꾸는 중국으로부터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원나라 몽골족의 중국 지배(1279~1368), 청나라 만주족[여진족]의 중국 지배(1644~1912), 1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홍콩 지배(1842~1977), 일본의 만주 지배(1932~1945) 5천년 역사에 500년 이상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가 이민족의 식민지 또는 점령지가 되었던 한족 중심의 중국은 이민족과 강대국에 대한 피해의식과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중국 한족의 이민족 몽골족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도 무시할 수 없다. 원나라 몽골족이 남송(南宋)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한족들은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전락하였고, 원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한 후에도 한족 여성들은 결혼할 때 신랑과 잠자리를 해야 하는 초야권(初夜權)을 몽골 군인들에게 바쳐야 했다.

 

중국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만주족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의 후손들을 모아 노비로 삼았다. 명나라에 충성을 고집하는 고관들은 모두 목을 베어 거리에 시체가 즐비했다. 만주족을 섬기는 한족들은 살려주었지만 만주족에게 저항하는 한족들은 모두 살육하였다.

 

난징 대학살에 대한 끔찍한 현장은 아직도 중국인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중일 전쟁 때인 193712월부터 6주 동안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 제국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 한족 여성들을 무차별 강간하고 학살하는 등 중국인 약 20만 명을 살해한 비극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최빈국 시절 다른 국가로부터 엄청난 자금과 기술 원조를 받아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지만, 인민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은 채,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만물 중국 기원설까지 전파하며, 지금처럼 힘이 있을 때 세계를 정복하지 않으면 다시 정복당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 중국은 심각한 피해망상에 이른 듯하다.

 

춘추시대(B.C.770~B.C.403)의 시집인 시경(詩經)과 공자(B.C.551~B.C.479)의 예에 관한 내용을 담은 예기(禮記)에는 "중국(中國)"은 한족(漢族)이 거주하는 지역 또는 한족이 세운 국가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중국도 한족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다민족 통일국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어떤 민족이든 삼켜서 몸집을 키우고, 어떤 힘이든 결집하여 세력을 키우며, 세계를 중국이라는 단일 국가로 통일하려고 한다. 이러한 중국의 무모한 야욕은 국제화를 추구하는 시대의 흐름에 배치된다. 이미 북한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국경이 허물어져 지구촌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뱀이 악어를 삼킨 후 악어가 자신을 삼킨 뱀의 몸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뱀이 죽게 되었다는 일화는 중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이 삼킨 5대 자치구는, 중국 본토 면적의 약 1.2배로, 아직도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시진핑과 중국 정부는 세계 지하자원 독점을 위해 남미와 아프리카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한편, 영토와 영해(領海) 확장을 위해 남중국해와 서해는 물론 주변의 우선 흡수 대상 국가인 한국 등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며 고도의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한국 흡수 전략과 함께 테무(TEMU), 알리익스프레스(AliExpress), (Shein) 등 중국의 전자상거래업체, 중국의 동영상 연예/대화방 틱톡(TikTok), 중국 전기차의 대명사 BYD 등이 잠식(蠶食) 수준을 넘어 파죽지세로 한국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한국 흡수 전략은 중국 정부가 국가 이름으로 수행하지 않고 인민을 통해 비공식적이고 비공개적으로 진행하는 일종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다수 인민은 정상적인 인격의 주체나 의사결정의 주체로 보기 힘들 정도로 중국 정부에 의해 매우 심각하게 세뇌(洗腦)되어 국가의 투사(鬪士)처럼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인민들이 세뇌당한 내용 중에는 주요 흡수 대상 국가인 한국을 극도로 혐오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업체가 대대적으로 제공하는 각종 홍보 사은품과 저가 상품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헤어나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중국의 거대한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차피 한국이 초강대국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면 중국에 기대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야당 대표 시절 발언도 한국을 흡수하려는 중국을 도와주는 촉진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한국을 마치 주권이 없는 국가처럼 경멸하듯 함부로 말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태도 또한 중국의 한국 흡수 야욕에 긍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어찌 보면 한국은 미지근한 물로 채워진 가마솥 안에서 무심하게 헤엄치는 개구리와 같은 처지일지도 모른다. 마른 장작으로 가마솥을 가열한다면 개구리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하다. 지금의 한국은 50g의 개구리가 5kg의 가마솥 뚜껑을 열고 탈출해야 하는 지혜가 필요한 위기 상황일 수 있다.

 

원나라 몽골족의 중국 지배가 시작된 1279년부터 영국의 홍콩 지배가 끝난 1977년까지 698년 동안, 원나라의 중국 지배 89, 청나라의 중국 지배 268, 영국의 홍콩 지배 65(1912~1977), 일본의 만주 지배 13년 등 총 435년을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가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은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문 일이다.

 

이러하듯 한족 중국은 원나라 몽골족, 청나라 여진족 등 여러 이민족으로부터 끔찍한 고통을 경험한 바 있다. 시진핑은 자신의 지위는 황제로, 인민의 지위는 노예로, 대륙의 영토는 사유로 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아가 강대국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세계 도처의 약소국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화가 날 때 그 결과를 생각하라.”는 공자의 말을 새겨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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