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성인은 나타나지 않고, 세계인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의식 수준을 가진 함량 미달의 국가 지도자들이 나타나, 독재와 약육강식(弱肉强食) 등으로 지구촌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2,649년 전인 기원전 624년에 탄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본명은 싯다르타 가우타마이며, 지금의 네팔 지역에서 아버지 정반왕(; 슈도다나)과 어머니 마야 부인 사이에 왕자로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발의 노인, 병들어 고통받는 사람, 장례식 행렬, 조용히 걸어가는 사문(沙門)을 보면서 삶의 본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결국 29세 때에 궁궐을 떠나 불가(佛家)에서 도를 닦는 사문이 되었고, 35세에 득도(得道)하였다. 불교의 원조(元祖)로 불리며,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이다. 과거칠불이라 함은 지난 세상에 나타난 일곱 부처을 말하며. 1) 비바시불, 2) 시기불, 3) 비사부불, 4) 구류손불, 5) 구나함모니불, 6) 카시아파불, 7) 석가모니불이다. 그 후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를 교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설립하였다. 45년 동안 인도 각지를 다니며 포교하다가 80세에 입적하였다.


공자는 2,576년 전인 B.C.551에 하급 귀족 무사(武士)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었고, 안징재는 16세였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9세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세 때부터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예(禮)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공자는 중국 춘추 시대(B.C. 770~B.C. 403)의 사상가이자 학자였다.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며,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등의 중국 고전을 정리하였다. 제자들이 엮은 ≪논어(論語)≫에 그의 언행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2,495년 전인 기원전 469년에 석공(石工)이자 조각가였던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산파(産婆)였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는 아테네의 서민 가정에서 탄생했다. 성장 초기에는 직업을 세습하던 당시 문화에 따라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다. 소크라테스는 맹목적으로 공동체에 헌신하거나 무조건 정치적 권위에 고분고분한 시민은 아니었다.

민주제든 과두제(寡頭制)든, 그가 판단하기에 옳지 않은 결정을 내린다면 결코 따르지 않았다. 소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표결로 처벌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반대했고, 선동가들의 협박과 대중의 고함에도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문답을 통하여 상대의 무지(無知)를 깨닫게 하고, 시민의 도덕의식을 개혁하는 일에 힘썼다. 신(神)을 모독하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독배(毒杯)를 받고 죽었다. 그의 사상은 제자 플라톤의 ≪대화편(對話篇)≫에 전하여진다.


예수는 2,029년 전인 기원전 4년에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지방의 갈릴리에서 탄생한 유태인으로, 직업은 목수였다. 예수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등 다양한 이름과 칭호로 불리며, 유대인 설교자, 종교 지도자, 기독교 창시자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유태인은 예로부터 야훼(Jahweh) 신을 믿어 야훼가 구세주(Messiah)를 보내, 신의 선민(選民)인 유태 민족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태인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그들의 절망은 깊어져, 이 세상의 종말과 '신의 나라'를 실현할 메시아를 강렬히 요구하고 있었다.

유태의 지배계급은 로마의 지배에 협력하고, 유태교 율법의 고정화와 형식화에 전념하여, 민중의 고뇌에 부응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로마의 압제와 빈곤, 종말론과 메시아사상의 격화 속에서 메시아[구세주; 그리스도]의 출현을 기다린 엣세네(Essene)파 등의 운동이 일어나 유태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다. 예수는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는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로 인류 구원을 위해 성령(聖靈)에 의하여 마리아의 태내(胎內)에서 사람으로 잉태되었다고 믿는다. 따라서 예수는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민족신인 야훼의 아들이며,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메시아로 전해지고 있다.


세계 4대 성인(聖人)인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는 2,029년 전부터 2,649년 전 사이에 탄생했다. 과거 620년 동안 4명의 성인이 나타났고, 석가모니의 탄생 시점인 기원전 624년을 기점으로, 73년, 82년, 465년의 간격을 두고 각각 1명의 성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이 지구상에 출현한 후 적어도 2,000년 이상이 지났다. 지나간 기간으로만 보면 다수의 성인이 출현하고도 남을 만한 세월이다.
그런데 기다리던 성인은 나타나지 않고, 세계인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의식 수준을 가진 함량 미달의 국가 지도자들이 나타나, 독재와 약육강식(弱肉强食) 등으로 지구촌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오랫동안 성인의 출현을 기다려 온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깝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칸트(1724~1804), 간디(1869~1948), 테레사 수녀(1910~1997), 14대 달라이 라마 (; 땐진 갸초)(1935~) 등이 4대 성인에 필적할 수 있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이상 원문 일부 : 위키백과. 그림 : AI 이미지)

지금 국제사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세계 대전을 마치 주기적으로 치루는 이벤트(event)처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1939년 발발하여 1945년 종결된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사망한 사람은, 군인 2,400만 명, 민간인 4,900만 명 등 총 7,300만 명 이상이다. 전쟁 당시 세계 인구 25억 명(추산)의 2.92%가 목숨을 잃었다. 만약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현재 세계 인구 82억 명 중에 3.66%에 해당하는 3억 명이 사망하고, 7억 명이 다친다면, 지구촌은 거대한 화장장, 호스피스 병동, 응급 병동 등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고, 세계 경제의 재건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제3차 세계 대전이 불가피하고 당연하며, 오히려 세계적인 대전쟁이 경제 활성화와 인류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가는 지도자도 없지 않다.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부추기는 현시점에 전쟁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성인의 출현이 기다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전쟁을 시작할 경우, 명분이나 당위성에 관계없이, 전쟁을 시작한 지도자를 국제사회의 이름으로 즉각 처벌하자는데 세계인의 공감대가 강력하게 형성되지 않는 한, 또 다른 대전을 막기 어려울 수도 있다.

대량 살상 무기의 양과 질은 85년 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可恐)할 만하다. 핵탄두 보유량(추정) 상위 5대 국가를 보면, 러시아 5,580기, 미국 5,044기, 중국 500기, 프랑스 290기, 영국 225기로, 이들 5개 국가의 전체 핵탄두는 11,639기에 이른다. 세계의 경제 규모 또한 85년 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 세계의 경제력은 전쟁을 격화시키고 지속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연료가 된다. 세계의 경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전쟁 속 지구촌은 더 대규모로, 더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다. 잠시 머물다 간 성인(聖人)의 높은 의식 세계는 수천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지만,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쌓아 올린 경제발전의 공든 탑은 전쟁으로 순식간에 무너져 제거하기조차 힘든 쓰레기가 된다. (통계 : 위키백과. 그림 : AI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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