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3일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보냈으나, 국방장관 신성모는 남침 정보를 무시하였고,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에게 명령을 내려 전군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제하였다.”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1950년 춘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종합정보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러한 정보를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했고, 미국 극동군사령부에도 제보하여, 무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공산군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한국군의 정보는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여, 경시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미군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를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와 대전차포 90% 이상을 압수했다. 이 일로 인해 북한이 남침할 명분이 생겼고, 19506월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수없이 보냈지만, 국방장관 신성모는 북한은 절대로 남침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받은 정보를 무시했다.

 

1950623일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보냈으나, 국방장관 신성모는 남침 정보를 무시하였고,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에게 명령을 내려 전군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제하였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국군 장병들을 휴가와 외출을 보낼 것을 요청했고, 국방장관 신성모는 이를 허락하였다. 국군 병력의 반 이상을 휴가 또는 외출을 보낸 이 일은, 정보를 받은 북한에게는 큰 손실 없이 남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결국에는 6.25 전쟁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군 비상경계령이 모두 해제되었고, 국군 병력의 50% 이상이 병영 밖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에 대한 북한의 기습공격이 감행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 3일 만인 627일에 이미 서울이 점령되었다.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군이 초전에 우세하였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7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맥아더는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허세만 가득하고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해임 건의를 했다.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된 채병덕은 1개 연대 병력만 맡아 부산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지휘 경험 부족으로 전사했다. (이상 원문 일부 - 위키백과)

 

북한은 절대로 남침하지 않는다며 정보국의 보고를 철저히 무시하고, 육군참모총장에게 명령을 내려 전군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제하게 하며, 국군 장병 50% 이상의 휴가와 외출을 허락했던 국방장관 신성모는, 그 후 국무총리서리, 주일 대표, 해사위원회 위원장, 대한조선공사 사장, 한국해양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고, 19605월에 뇌일혈로 사망했다. 사망 후 건국훈장 애족장(1990)이 추서되었으며, 199310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육군본부 정보국의 보고를 여러 차례 받고도, 제대로 검토조차 하지 않은 채, 너무 가볍게 무시하여 버린 한국과 미국 상부의 안이한 판단 때문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의 공격에 철저하게 대비하는 듯한 시늉만 했어도 막을 수 있었던 이 어처구니없는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남한의 국군은 전사 147,000여 명, 부상 709,000여 명, 실종 131,000여 명에 이르렀다. 남한의 민간인 피해는, 학살당한 국민 128,936, 사망자 244,663, 부상자 229,625, 북으로 납치된 국민 84,532, 행방불명 33312, 의용군 강제징집자 40만여 명이었다. 북한군은 52만여 명이 사망하고, 406,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민간인 손실은 200만여 명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유엔군은 전사 35,000여 명, 부상 115,000여 명, 실종 1,500여 명으로 파악되었다. (사진/통계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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