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라는 쇼 비즈니스

미리 밝히고 가겠습니다. 저는 성(性)적 차별을 싫어합니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양성애든, 무성애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라고 봅니다. 앤디 워홀(1928-1987)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그가 게이라서 싫은 건 아닙니다. (남자동성애자를 흔히 호모라고 부르는데, ‘호모’라는 단어는 가급적 안 쓰는 게 좋습니다. 왜 그런지는 직접 찾아보시길.^^)

같은 부류라도 바스키아는 그리 싫지 않습니다. 원래 싫은 데는 이유가 없는 법입니다. “그냥 싫다”는 것, 그게 유일한 이유지요. 그를 싫어하는 건, 그저 제 취향일 뿐이랍니다. (일단 생긴 거부터 맘에 안 든다면 이해하시겠지요?^^)

자,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갑니다. ‘길거리 캐스팅된 바스키아의 등장’까지 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1960∼88)는 서구현대미술계에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첫 흑인화가.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진부한 표현 그대로입니다.

<Notary(공증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1983). 바스키아 이전에는 아무도 이렇게 그리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별똥별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지요? 바스키아도 똑같습니다. 업계 대스타 워홀의 연인으로, 또 그의 원조와 후광에 힘입어 승승장구했지만,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시장에서 통하는 ‘상품성’과 작품자체가 지닌 아름다움은, 얼핏 보면 같아보여도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현대미술업계에서 바스키아가 이룩한 전설은, ‘쇼 비즈니스’와 뒤섞여 한눈에 구별 짓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일부러 ‘업계’란 표현을 썼습니다. 상업성이 지나치게 두드러진 측면을 나타내려고요.) 그를 세계적 스타로 만들고 싶어 몸살이 난 화상(畫商)들의 기획과, 스폰서인 워홀의 애증과, 바스키아 자신의 욕망이 한데 뒤섞여, 마침내 거대한 신화가 탄생합니다.

그림제목이 <Dos Cabezas’(1982)>. 스페인어로, 쌍두(雙頭), ‘머리 둘 달린 생물’이란 뜻입니다. 음... 좋은 의미 같지는 않네요. 워홀과 자신의 얼굴을 나란히 그렸습니다. 

때로는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각자 무슨 생각을 가졌든 간에 서로가 필요했던 두 사람. 눈빛들을 한번 보세요. 여전히 뜨거운 창작욕으로 불타건만 어딘가 불안한 바스키아의 눈빛과, ‘노털 워홀’의 음험하고 탁한 눈빛이 대조적입니다. (저한테만 그런가요?)

<자니펌프에서 강아지와 나(Boy And Dog In A Johnnypump, 1982)>. 자니펌프(Johnnypump)는 물이 터진 길거리의 소화전을 말합니다. 여름철, 가난한 아이들한테는 더없이 좋은 놀이터지요. 이렇게요.

저 사진처럼 그는, 자니펌프 아래서 세상시름을 잊고 뛰어노는 순진무구한 어린애와 같았습니다. ‘바스키아 신화’는 사실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에 불과합니다. ‘쇼 비즈니스 스타시스템’ 아래 명멸해가는 수많은 ‘신데렐라들’ 가운데 하나인 거지요. “눈뜨니 유명해졌더라”는 말처럼 ‘하루아침에 왕창’ 뜨는 바람에 오히려 엄청 고독해진 흑인청년. 고립과 불안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서서히 마약에 찌들어 요절하는 것으로, 그 화려하고도 우울한 스토리는 막을 내립니다.

달리 말하면, ‘건방진 깜둥이가 반짝 인기에 기고만장하는 꼴’을 보다 못해, 백인들이 그를 도시 한가운데다 내다버린 것입니다. 바스키아는 자신의 낙서그림을 두고 ‘문명의 해독제’니 뭐니 하며 호사가들이 설왕설래하자, 이런 말을 툭, 던집니다. “이 무슨 개똥같은 소리야? 그저 되는 대로 휘갈긴 낙서구만.”

워홀의 (게이사냥)레이더에 잡힌 또 다른 낙서화가가 한명 있습니다. 키스 헤링(Keith Haring, 1958-1990).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83년. 둘은 금세 뜨거운 사이가 됩니다. 워홀한테는 바스키아와 같은, 새로운 ‘젊은 피’가 (당연히)필요했던 거지요.

나이는 무려 30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말년에 워홀은 헤링을 통해 ‘아방가르드(전위) 청년문화’의 활기를, 마치 빨대를 꽂은 듯 쭉쭉 빨아들입니다. 헤링 또한 워홀의 도움을 받아 유명화랑의 전속작가로 급성장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는 아니고(남자들끼리니까),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라고나 할까요?

당대 뉴욕을 점령한 아방가르드예술은 ‘이스트빌리지’의 나이트클럽서 싹이 텄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홍대앞’ 같은 곳이지요. 주 메뉴는 다문화주의, 힙합댄스, 뉴웨이브 음악이고요. 오늘날 지구촌 여러 대중예술들이 모두 여기서 영감을 받아 출발했습니다. 대표선수로 가수 마돈나와 보이 조지가 얼른 생각납니다.

사진오른쪽그림은 <앤디마우스와 뉴 콕>시리즈로, 스폰서이자 연인인 워홀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습니다. ‘뉴 콕’은 ‘새 코카콜라’말고도 ‘새로 맛본 거시기’란 뜻도 됩니다. 흠, 은근히 음란하군요.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사생활을 아주 비밀스럽게 관리한 워홀과 달리, 헤링은 스스로 동성연애자임을 공공연히 떠들었습니다. 젊은 선수다운 ‘패기’라고나 할까요. 그림을 봐도 딱 그렇습니다. 생명력과 에너지가 철철 넘칩니다.

굵직굵직한 선, 강렬한 색채, 만화 같은 단순한 스타일은 그만의 독창적인 트레이드마크입니다. 천진난만한 그림이지만, 가끔은 노골적인 성묘사가 불쑥 나오니, 그림이 예쁘다고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간 낭패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아이들과 볼 때는 주의하셔야 됩니다. (방심은 금물.ㅎㅎ)

헤링이 낙서삼매에 빠진 모습이군요. 헤링한테 그림그리기는 세상과 나누는 대화, 곧 소통이었습니다. 무명시절에 경찰단속을 피해 몰래몰래 낙서를 하다가 숱하게 체포가 되었어도, ‘그놈의 낙서질’만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좋아하는 걸 보고는, 그림이 대중한테 끼치는 진짜 영향력을, 현장에서, 피부 깊숙이 느꼈습니다. 비록 하찮은 낙서지만 말이지요.

‘거리낙서 퍼포먼스’를 그만둔 건 그가 유명해지고 나서입니다. 배가 불러 그랬던 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유명해지자마자, 거리의 낙서그림들이 마구 뜯겨나가 높은 값에 거래되는 걸 목격한 뒤부터지요. 자기그림이 화랑이나 미술시장 같은 ‘제도권’으로 유입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미술에 대한 권리가 있다. 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헤링이 남긴 (멋진)말입니다. 32살에 갔습니다. 너무 이른 나이... 그놈의 에이즈가 ‘웬쑤’입니다. 끝으로, 워홀이 남긴 유명한 어록을 몇 개 소개합니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저 심심풀이로 보면 됩니다. 말이 많은 순서대로 나옵니다. 마지막에 소개한 멘트는 워낙 ‘오묘+난해’해, 굳이 따로 해설을 붙였습니다.

-“돈 버는 것도 예술, 일 하는 것도 예술, 사업도 예술이다. 결국 비즈니스를 잘 하는 게 최고의 예술인 것이다.”

-“무언가 소망하기를 멈추는 순간, 당신은 그걸 얻게 된다. 이 명제가 절대적임을 나는 안다. 믿어라.”

-“앤디워홀을 알고 싶나? 그럼, 내 그림과 영화의 표면만 봐라. 그 이면엔 아무 것도 없으니까.”

-“나는 항상 기계이길 바란다.”

-“모든 게 아름답다.”

-“음..... 암.....”

(굳이 붙인 해설 : 워홀은, 원체 말이 어눌해 자기작품을 사람들한테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지를 못했지요. 인터뷰할 때 기자가 무슨 질문을 하면, 더듬거리기 일쑤라 처음엔 엄청 조롱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턴 아예 작품설명을 하지 않거나 침묵으로만 일관했답니다. 이런 태도를 신비롭다며, 언론과 대중은 오히려 더 열광했고요. 참, 아이러니하지요? 어쨌든 이런 태도 덕분에 “대중매체의 위력을 한껏 활용, 미술이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었음을 당당히 입증했다”는 평가를 나중에 받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을 말할까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솔직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