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 전 상임대표

 

1989년 필자는 검인정 교과서 제도를 규정한 교육법 제 157조에 대한 위헌을 주장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필자는 이해당사자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었던 터라 헌법소원의 소장에는 이름이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장을 쓰는 일에서부터 변론 등은 대부분 필자가 수행하였다. 정부측 변호인은 김상철 교수 등 30명의 내로라하는 헌법학자 등이 담당하였다.

당시 필자가 위헌성을 주창한 이유는 교육부 장관이 직접 저작하게 하거나 검정(=허가)하는 행위가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청치적 중립성을 표방한 헌법 제31조 4항을 위반하고 있으며, 국민의 기본권인 학문의 자유, 출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재량성을 넘어 침해하는 것이었다. 교육부 장관이 헌법기관이 아닌 이상 결국 정치적으로 민감 사항에 대해서는 결과적으로 정치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제도 자체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92년 이 소송은 아쉽게도 패소하였다.

필자의 이러한 생각의 근원에는 이 법이 을사보호조약에서 일제가 침략의 의욕을 노골화하기 시작하면서 만든 법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당시 교과서는 통감부에서 저적하거나 검정한 것에 한하여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총독부가 통감부를 대체하였다. 일제는 이 제도를 통해 당시 서당 등을 중심으로 발전한 민족교육을 말살하고 수신 교과서 발행 등 황국신민화를 위한 교과를 강제하였다. 미군정 시기에 일시적으로 자유발행제가 중심이었으며, 1949년 이후 해방 후 다시 총독부 대신 교육부로 대체되었다. 말하자면 교육법 제157조는 일제 잔재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패전 이후 국정제를 페지하고 검정제 중심제로 전환하였다. 국정제가 전쟁을 일으킨 원흉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은 이 검정제도조차 제국주의 산물임을 기억하고 제국주의 이전의 제도인 자유발행제로 돌아가 주장하고 검정제 교과서에 대한 위헌 소송을 1965년에 제기하였다. '교육부 대신이 만든 학습지도요령은 위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3만명의 일본 시민들이 참여한 이 소송도 1997년 보수 회귀의 전반적 흐름 속에 역시 패소하였다. 당시 소송에 참여한 시민들은 한국의 필자에게도 소송비 일부와 관련 자료를 제공하였다. 지금 아베가 한국의 독도를 일본 땅이라 우기는 근간에는 이 검정제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비록 소송은 실패하였지만 교과서가 정치적 입김에 좌우될 수 있다고 헌법재판소는 판단하였으며, 한국 정부는 이후 출판 시장에서 경쟁자가 없을 가능성이 큰 교과서만을 국정제로 유지하였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러한 조치들을 교육 민주화의 중요한 흐름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정보화 시대로 들어서면서 페이퍼 교과서에서 디지털 교과서로 전환하여야 할 상황이 되자, 인정제 및 자유발행제가 주창되었다. 최근까지 차관을 지내다 국정제 전환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경질된 김재춘 차관도 자유발행제 주창자 중 한 사람이었다.

국·검정제 중심제에서 인정제 또는 자유발행제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근거는 집단지성에 의한 학습이야말로 미래 창조사회 건설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실제 대부분 자유민주주의 선진국들은 실제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자유발행제 중심으로 교과서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미 잘 정착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자유발행제는커녕 검정교과서 조차도 국정교과서로 회귀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의 국정교과서 회귀 현상의 이면에는 집필 및 채택의 중심적 권한을 가진 국사학계 및 국사교사가 형성하고 있는 집단지성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말하자면 저항사관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창조하는 것보다는 이에 따른 문제점이 지나치게 부각되고 주류 사회에 대한 저항을 선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제기들은 건전한 것이고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비판의 논거가 역사교과서 국정제 회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검정교과서는 교육부가 정한 교육과정을 따라야 하며, 집필 지침을 준수하여야 한다. 교육과정과 집필 지침의 결정이나 국정제에서의 저작과정 개입은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 검정교과서라도 교육부장관은 직권 수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만약 지금이라도 국사 교과서가 문제가 있다면 교육부장관은 내년도 교과서 내용을 직권 수정하면 그만이다. 더욱이 집필 및 채택과정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받아들여지면 그만이다. 그런데 교학사 교과서는 현재 인기가 없을 뿐이다. 아무래도 민족 감정을 건드리고 있는 일부의 서술 때문이다.

교육부가 얼마든지 직권 수정할 수 있고 채택과정에서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면서도 이를 하지 않고 국정제 회귀를 주창하는 이유에 대해 필자는 아무래도 그 의도가 교육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좌우 이분법이 여론 통제에 용이하기 때문에 국정교과서 회귀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현재의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찬성이든, 반대든 정치권이지 교육계는 아니다. 그리고 반사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은 좌우 양 극단에 있는 세력들이다. 대신 대다수 국민들은 엄청난 정치적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국민이 치러야 할 가장 심각한 비용은 정권을 잡으면 집단지성을 부정하고 역사를 입맛대로 기록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쿠데타가 아니라도 히틀러나 스탈린의 망령이 부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국정제 회귀 논의가 아니라 지금의 검정제를 자유발행제로 개혁하는 조치를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창조사회로 가는 길이요 선진국 진입의 문턱이다. 이미 정치권을 조금만 벗어나보면 대한민국 사회는 이미 집단지성이 이끄는 사회로 성숙하였음을 느낀다. 정치권만 각성하여 탈각하면 그만이다.

이인규(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 전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