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한 엘리트들이 물욕에 굴복해 일탈과 부패를 저지르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일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권력을 남용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이들이 국가의 고위관료들과 세계적인 기업인들이라는 사실은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을 허탈과 분노에 빠뜨리고 있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의 인생 목표는 언제부터인가 대학 진학, 그것도 일류 명문대학 입학이 된 것 같다. 

아니 아이들의 인생 목표가 아니라 부모들의 인생 목표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부모들은 어떻게든 자녀를 상위권 대학에 진학시키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에 여념이 없다. 

1, 2년씩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초등학교, 유치원 시절부터 대학입시를 목표로 한 각종 사교육으로 아이들을 내몰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태중에 있는 아기에 대해서조차 무엇인가를 학습시키겠다고 하면서 20년 뒤의 입시를 벌써부터 준비하는 산모들도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상위권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서는 미래의 안정된 삶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있다. 

절대적 빈곤에서는 벗어났으나 상대적 빈곤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은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져야 할 것을 계속해서 부추기기에, 오늘도 부모들은 두려움과 불안감 속에서 자녀의 상위권 대학 진학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의 성공적인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자녀의 체력’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한다는 이 웃지 못할 말을 자녀교육의 시금석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부모들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녀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고 유망 전문 직종에 종사하게 되었다고 해서 부모의 욕망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 욕망은 대물림되어 이젠 자녀들 스스로 자신이 소유하게 된 것을 더욱 공고히 지키고자 하면서 욕망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게 된다. 

어쩌면 부모 세대보다 더욱 독하게 자녀들을 욕망의 링 위에 세우게 될 수도 있다.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야 할 때를 망각한 채 달리다 어느 순간 큰 사고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 세간에 오르내리는 파워엘리트들의 몰락처럼 말이다. 극단적인 가정일 수도 있으나 충분 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이미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 수도 있다. 

부모들은 강변할지 모른다. 나는 오직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려는 부모로서의 순수한 마음밖에 없었다고. 아이들의 삶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기를 바 랐을 뿐이라고. 

그러나 부모들의 동기가 정말 순수하고 신뢰할만한 것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부모들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자녀를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던 많은 부모들과 그 자녀들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과연 다른 사람만큼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가진 것이 나보다 소중한 것은 아니다. 진짜 귀한 것은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값어치만큼으로 창조된 나의 존재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짓된 생각을 버리자.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관심을 가지자. 아우슈비츠에서 수용소에서의 삶을 책으로 낸 빅터 프랭클은 하루에 한 컵만 배급되는 물의 절반을 남겨 그 물로 세수도 하고 면도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존귀히 여겼던 그 몸짓으로 생존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자. 많은 부모들은 과도한 입시경쟁의 탓을 우리나라 교육정책으로 돌리곤 한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제도나 교육정책이 보다 온전해지기를 기다린 후에라야 아이를 기를 수는 없다. 

현재 환경에서도 우리는 용기를 내어 아이들을 기르고 지켜내야 한다. 나치가 항복을 선언하기 전에라도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가정에서의 부모의 영향력이 학교와 사회의 영향력보다 크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