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된 명확성과 상징의 탄생

그림을 먼저 보실까요.

얀 베르메르(1632-1675)가 그린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1665-1666)’입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습니다. ‘명작스캔들’이란 TV프로그램에도 나왔지요. 워낙 유명한 그림입니다. 이번시간에는 이 그림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베르메르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43살에 죽었으니 요즘 기준으로 보면 그리 오래 살지 못한 편이지요. (평균수명이 짧았던 당시를 감안해도 그렇습니다.) 자녀를 무려 11명이나 두었고, 흔한 자화상 한 점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이 그림에 나오는 화가의 뒷모습이 베르메르일 것으로 추측되는 유일한 모습이라네요.

베일에 가려진 그의 생애만큼이나 이 그림은 수수께끼 같은 요소가 많습니다. 우선, 다른 작품에 비해 이례적으로 대작이지요. (가로 * 세로, 100 * 120) 베르메르가 남긴, 다른 30여 점의 그림은 대개 폭이 40센티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뜻이 모호한 여러 등장소품들도 ‘비밀스러움’에 한몫을 단단히 합니다. 그림제목조차 작가가 직접 지은 게 아니라 후대사람들이 제멋대로 붙였답니다.

무슨 이유에선가 제목은 짓지 않았으나 작가가 평생 가장 아낀 작품입니다. 베르메르가 죽은 뒤 가족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쫓기면서도 이 그림만은 끝까지 팔지 않으려 애썼다고 하네요. 결국은 경매로 넘어갔다는데 왠지 짠합니다. 그림 속 화가가 묘사하는 모델인 여성에 대해서도 의견이 참으로 분분합니다. 미술관련 학자마다 다들 제 각각 한마디씩 하는 편이라고 봐도 됩니다. “음악의 신 뮤즈다, 역사의 신 클리오다, 아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당연히 정답은 없습니다. 확실한 점은 단 하나. 명확한 의도에 따라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

바닥타일의 꼭짓점들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악기를 든 여성모델의 오른손 쪽 소실점을 향합니다. 아시다시피 소실점은 원근법에 꼭 필요한 기술이지요. 화가의 뒷모습이 모델보다 두 배 이상 크게 표현된 것도 그런 계산이 반영된 결과고요. 천장에 매달린 촛대와 이젤 끝, 화면왼쪽아래 의자와 드리워진 커튼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들은 모두 여성모델을 향해 자연스레 시선이 모아지도록 유도합니다. 모델은 화면 정중앙보다 약간 왼편에 배치되어 위쪽에서 비스듬히 떨어지는 빛을 받고 있군요.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의 압권은 앞쪽의 슬쩍 젖혀진 커튼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손으로 커튼의 끝을 잡고 젖힌 채 마치 남의 화실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는 거지요.

맞습니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커튼 앞쪽에 놓인 의자에 슬며시 앉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림 속으로 빨려들게 만드는 장치지요. 더구나 이 커튼으로 말미암아 근경, 중경, 원경이라는 원근법의 3요소가 완전하게 구현되고 있네요. 비록 2차원 평면에 그려진 그림(실내 정경)이지만, 공간감이 워낙 풍성해 실제로 공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화가가 앉아있는 (등 받침대 없는) 작업용의자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자세히 보시면 의자가 아주 살짝, 앞으로 기울어진 걸 발견하실 겁니다. 얼핏 보면 거의 표시나지 않습니다만, 이 미세한 불균형이 그림에 엄청난 긴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런 자세로 앉아 그림을 그려보면 의자가 저렇게 조금씩 앞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답니다.) 중심을 잡으려 앞으로 뻗은 화가의 두 발을 보시지요. 그림에 집중하는 화가의 몸과, 앞에 놓인 이젤이 다함께 A자 형을 이룹니다. 관람자의 시선은 자연스레 A자의 꼭짓점으로 올라가겠지요? 

자, 그런데 이러한 자연스런 동세를 거슬러 모델이 있는 왼쪽으로 화가의 고개가 척, 돌아가 있습니다. 정중동이랄까요. 침 삼키는 소리마저 다 들릴 것 같은 적멸한 실내에 마치 ‘소리없는 아우성’처럼, 이른바 ‘밀도 높은 역동성’이 발생하는 순간입니다. 이마와 양 미간에 주름을 꽉 잡은 채 잔뜩 모델을 노려보는 화가의 집중한 표정이 훤히 다 읽히는 것 같지 않나요? 보이는 건 뒷모습뿐인데도 말씀이지요.

나머지 소품들이 상징하는 바는 직접 한번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꽤 흥미롭습니다. 검색하면 자세히 나오니, 그리 수고스럽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베르메르의 작품에 얽힌 뒷얘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고 마칩니다. 내용이 다소 길어졌군요. 긴 시간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계속)

“(전략) 베르메르의 생애나 그림과 관련된 가장 큰 ‘사건’은 아무래도 네덜란드 사람인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이 저지른 위조사건일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의 나치점령지역에서 상당량의 약탈예술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중에는 나치수뇌부 헤르만 괴링의 수집품도 있었다. 연합군측이 의뢰한 전문가들이 확인해보니 베르메르의 그림도 상당수 있었다. 그 수집품이 원소유자가 암스테르담의 나이트클럽소유자 메이헤런이란 사실을 밝혀낸 연합국측은 그를 나치협력자로 체포했다. 메이헤런은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최고미술가의 작품을 나치에 팔아넘긴 혐의로 사형까지 당할 운명에 처해졌다. 그제야 그는 진실을 토로했다. 그것은 모두 메이헤런이 그럴 듯하게 베낀 위조작품들이었다.

그가 베르메르를 위조한 까닭이 흥미롭다. 베르메르의 고향 델프트의 공과대학을 졸업한 메이헤런은 화가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아버지도 반대했고 무엇보다 비평가들의 냉랭한 평가가 고통스러웠다. 그는 비평가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못 알아본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들을 희롱하기 위해 위작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대상이 베르메르였다. 베르메르는 그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생애와 이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그래서 그가 겨우 40점도 안 되는 그림만 그렸겠는가 하는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위작을 그리기 좋은 대상이었다. 그는 베르메르 시대의 캔버스와 붓과 물감을 구해 그림을 그렸다. 화공약품으로 300년 쯤 지난 것처럼 처리까지 했다. 네덜란드 미술계와 비평가들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그쯤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메이헤런은 수집가들이 거액을 내놓고 그림을 앞 다퉈 사가자 위작을 더 많이 그렸다. 2차 대전 와중에도 위작은 멈추지 않았다. 나치 수뇌부 헤르만 괴링도 거액을 주고 메이헤런이 위작한 베르메르의 그림을 구입했다. 놀라운 것은 나치 2인자 괴링이 지불한 돈은 모조리 위조지폐로 밝혀졌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실로 ‘웃지 못 할’ 마지막장이 남아 있었다. 네덜란드 사법당국은 메이헤런에 대해 사법적인 최종판단을 내리기 위해 실제로 위작을 시연하도록 명령했다. 메이헤런은 자신의 ‘거짓’을 증명하지 못하면 ‘진품’을 독일 최고 수뇌부에 헌납한 전범자가 될 운명이 되었다. 그래서 메이헤런은 철저한 감시 속에 진행된 시연에 최선을 다해 응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잠시 베르메르가 되어야만 했다. 아마도 사법당국 앞에서 위작을 재연하는 그 순간만큼은 메이헤런의 몸속에 베르메르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메이헤런이 재현한 베르메르 풍 종교화는 너무나 훌륭했다. 화공약품처리만 하면 누구라도 300년 전의 그림으로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이를 지켜본 미술계 전문가들은 말했다. ‘우리는 베르메르를 잃었지만 그 대신 판 메이헤런을 발견했다.’ 그는 미술품 위조로 2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건강악화로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죽었다. 1947년 12월 29일의 일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누군가 영화시나리오로 쓰게 되면 '너무 영화 같잖아!'하고 힐난 받을 수도 있을, 가짜 인생의 진실한 이야기다. (오마이뉴스, 정윤수 블로그, 2008.10.31. [10월 31일] 일상예찬, 그리고 수많은 비밀들-베르메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