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전문가의 자세는? 마땅히 갖춰야 할 자격, 실력 갖춘 뒤
자신의 신념, 믿음 바탕으로 책임감 갖고 결과물로 세상과 공유

[에듀인뉴스] "저희는 프랑스 파리에 사는 행정가, 건축가, 예술가, 보건전문가, 경영전문가, 평범한 직장인과 유학생입니다. 언젠가 자신의 전공과 삶을 이야기하다 한국의 많은 분과 함께 나누는 매개체가 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전공과 각자의 철학과 시선으로 느끼고 바라본 프랑스의 이야기에서 시사점을 얻어가길 바라며 프랑스의 한국인 이야기를 관심 갖고 지켜봐주십시오."

왼쪽부터 왕자와 거지 표지그림.(출처=The Prince and the Pauper by Mark Twain, New York 1899, p 35) 왕자 옷을 입은 톱과 거지 옷을 입은 에드워드, 그 뒤로 그 둘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
왼쪽부터 왕자와 거지 표지그림.(출처=The Prince and the Pauper by Mark Twain, New York 1899, p 35) 왕자 옷을 입은 톱과 거지 옷을 입은 에드워드, 그 뒤로 그 둘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

달랑 옷 한 장 차이

[에듀인뉴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소재의 독창성으로 많은 영화나 소설에 모티브를 준 작품이다. 내용은 영국 에드워드 6세를 배경으로 똑같이 생겼지만 극과 극의 신분으로 태어난 이들의 삶이 서로 바뀌면서 마주하는 상황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평소 왕자의 삶을 동경했던 톰과 궁의 답답함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컸던 에드워드는 장난삼아 옷을 바꿔 입게 됨으로 역지사지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는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읽는 내내 가장 답답했던 부분은 신분을 밝힘에도 불구하고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왕자가 혹은 거지가 이상해졌다고만 생각할 뿐이지 그들의 주장을 알려고, 들으려 하지를 않는다. 

결정적으로 옥새의 위치 즉 왕자가 아니면 모르는 것을 말할 기회가 없었더라면 이 소설의 결말은 꽤 비극적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왕자와 거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의 옷이었다.

왕자는 태어나서부터 궁중예절, 학문, 무예 등을 철저하게 교육 받아왔을 것이다. 거지는 아무리 심성이 고아도 식사 예절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먹을 것을 빌어먹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것이다. 

이것은 왕자 옷을 입어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뀐다 해도 빠른 시일 내에 바뀔 수 없는 생활 습관이다. 행동을 찬찬히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을 옆집 친구도 아니고 누가 거지와 왕자에게 그러한 시간을 투자하며 알려 하겠는가. 

처음 사람을 볼 때 보이는 생김새와 옷. 사람들이 이 이상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또 있을까.

전문가의 옷

오늘날 현대인들의 옷은 조금 더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지위, 연봉, 출신지역, 학교, 집 등 수도 없이 많은 옷들이 존재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이러한 옷들은 세상에 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들이다. 다시 말해 한 분야의 전문가임을 알리며 일반인과 구분되어지기 위해 입는 사회적 옷이다. 비전문가의 영역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드러나는 옷들을 보며 전문가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나는 왕자와 거지를 못 알아본 사람들을 비판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단지 옷이 문제였을 뿐이다. 

옷을 바꿔 입은 것, 애초에 모든 원인과 잘못은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각자가 갖추어야 할 복장을 올바르게 갖추지 않은 것. 그래서 거지 옷을 입고 사람들로부터 거지 취급을 받는 이상 왕자의 품격을 지키며 왕자로서 좋은 생각을 품어도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격과 실력을 갖춘 후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바탕으로 책임감을 갖고 결과물을 통해 세상과 공유하는 것’. 이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전문가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학교 후배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삼촌이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가를 찾을 때 정말로, 솔직히 학벌을 볼 수밖에 없게 된다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내 집을 더 잘 지어줄 것 같은데 그 똑똑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학교 말고는 무엇이 있겠냐는 것이다. 

학벌이 일단 좋고 자격이 되는 사람 중에서 인격도 좋고, 마음씨도 따듯하다면 덤이라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참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 말이었다. 나는 어떠한 작품이든 그 안에는 작가의 생각과 철학뿐만 아니라 인격과 성격도 묻어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건축행위를 위해 많은 공부와 다양한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나름의 인성수양까지 하고 있는 많은 건축가들 앞에 놓인 냉정한 현실이 그 분의 말씀이라 생각하니 슬프기까지 했다. 

책임을 진다는 것

그럼 전문성은 갖추었지만 인성이 훌륭하지 않은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실제로 일본의 유명대학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집을 두고 고소 공방이 이루어진 사례가 있다. 건축주와 건축가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동창회에서 자신의 집을 지을 건축가를 찾는다는 말에 그 교수가 지어주겠다 해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던 것도 있었겠지만, 건축대학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가 건축주의 결정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지은 자신의 집은 결국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작가주의에 충실한 건물이 되었고 이에 대한 물질적 피해가 커지고 건축가는 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자 소송까지 가는 일로 마무리가 되었다. 사회적 옷은 잘 입었지만 책임감이 없는 전문가에게 맡겼을 때 얻게 된 안타까운 결과였다.

파리에서 석사과정 당시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와인 한잔하며 건축가의 삶의 애환을 나누던 중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왔다.

하나의 건축을 두고 벽돌공도 저 건물은 자신이 지었다 하고 설비사도, 시공사도 저 건물은 자신이 지었다고 얘기한다. 실로 다양한 기술자들이 저 건물은 자신이 지었다고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 건물은 누가 지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말처럼 모두가 다 지은 것일까? 이런저런 얘기가 분분한 가운데 조용히 거든 한 마디, ‘건물이 무너지면 제일먼저 불려가는 사람은 건축가 아니냐’는 나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던 기억이 난다. 

건축가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arch’와 짜내다, 만들다는 뜻의 ‘tect’ 단어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다. 즉 건물을 짓기 위해 모인 기술자들의 우두머리로 현장에서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감독, 지시하는 역할을 하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이 모든 악기를 전문가처럼 다룰 수는 없지만 곡과 악기의 특성을 분석 후 각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과 함께 한 곡을 완성시켜 나가는 역할을 한다. 

지휘자의 실수로 곡을 망칠 수 있고 곡을 망친 책임 또한 그에게 있으니 따라서 앞서 언급했던 건물이 잘못되었을 시 제일먼저 1차적 책임은 건축가에게 있다는 것과 그래서 그 건물은 건축가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이 억지는 아니라 믿는다. 

결론은 왕자의 옷에는 백성의 희로애락을 책임진다는 의미가 있고, 거지의 옷에는 제 한 몸만 책임지면 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왕자의 옷을 벗고 거지의 옷을 입는 순간 그 책임과 의무를 내려놓는다고 할 수 있다. 궁중의 답답한 질서와 엄한 교육을 받으며 백성을 위해 사는 왕자의 삶은 화려한 옷 너머에 있는 책임의 무게라 할 수 있다.

책임을 진다는 것.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는 느끼며 겸손해지는 것. 그래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 않은가. 

실력과 인성이 훌륭한 전문가를 구분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자신의 일 이외에 주어진 사소한 일에도 책임감을 갖고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무종 프랑스 유학생
유무종 프랑스 건축가

유무종 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 재학 중 프랑스 파리에서 해외 인턴쉽을 마쳤다. 이후 그르노블 Université Grenoble Alpes에서 도시설계학 석사를 마쳤고 파리의 Ecole spéciale d’architecture (그랑제꼴)에서 만장일치 합격과 félicitation으로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Arep Group에서 실무 후 현재 Atelier Patrick Corda에서 Junior Architect로 근무하고 있다.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우리가 건물을 만들지만 그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좋은 건축에서 살아야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환경결정론적 해석이 아닌 건물에 담겨진 이야기를 중점으로 칼럼을 쓰고자 한다.

건축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봐도 그렇다. 이 집에 오기까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사연, 집에서 살면서 늘어가는 저마다의 이야기들, 우리의 삶은 내가 살고 있는 공간과 함께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또 하나의 건물을 중심으로 그 건물과 지역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 주변에 감추어있다. 그래서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건물은 부동산적 소유재산 이전에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담는 그릇이라 여긴다. 따라서 건물을 살펴봄으로 우리는 각 사람의 삶의 형태와 가치관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다.

앞으로 글에서는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살펴본 여러 공간(건물)과 그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의 정서와 문화를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