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작가가 건네는 암호

뭉크(1863-1944)를 좋아하십니까?

노르웨이 출신 화가. ‘절규’란 그림이 유명하지요. 상징을 다루는 첫 이야기로 뭉크를 골랐습니다. 워낙 유명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다들 아시리라 보고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잘 모른다고 해도 웹에 이름 석 자만 입력하면 상세히 나오니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뭉크 그림은 한마디로 어둡습니다. ‘현대인의 내면을 격렬하고 고통스럽게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뭐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겠지요? 아시다시피 세상 모든 작가들의 작품세계는 개인경험으로부터 영향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나 누나처럼 가까운 가족을 질병으로 잃는 일을 겪었습니다.

작품설명을 펼치면 예외 없이 ‘유년시절 경험한 질병과 광기, 죽음의 형상들을 왜곡된 형태와 격렬한 색채에 담아 표현했다’고 나옵니다. 보는 사람마다 자기기준에 따라 평가하겠으나, 제 생각에 뭉크 그림이 지닌 큰 미덕은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혀있었다는군요.

“어릴 때부터 언제나 불안이 나를 따라다녔지만, 괴로운 경험을 오히려 예술로 바꾸어 치유했다. 이러한 성찰이 다른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신이 맞닥뜨린 절망에 고개 돌리지 않고, 똑바로 정면을 응시한 채 삶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외롭지만 강인한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사람은 마침내 불안이나 병, 상처와 고통 같은 인생의 어두운 자리를 훌훌 털고 넘어서는군요. 같은 그림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럼, 다같이 그의 대표작 ‘절규(1893년, 유화, 73.5 x 91cm)’를 한번 보실까요.

울렁울렁 붉은 노을에 물든 하늘이 휘익, 소용돌이처럼 굽이치는 해안물결과 한데 어울려 무척 어지럽군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화면왼쪽 중간가장자리부터 비스듬히 앞을 향해 곧게 쭉 뻗은 다리 위를 성큼성큼 건너오는 두 사람이 보입니다. 맨 앞 한가운데는 누군가 해골 같은 얼굴에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마구 비명을 내지르는 중이네요. 비명소리에 맞추어 노을과 물결조차 덩달아 불길한 화염에 휘감기듯 소용돌이칩니다. 성별이 뚜렷하지 않은 이 사람은 대체 어떤 공포와 마주친 것일까요? 정체불명인 끔찍한 무언가가 지금 당장 자신을 집어삼키기라도 하는 듯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뒤편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리나 보네요. 해질녘 느긋한 산책이라도 즐기는 듯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늘어진 S자로 몸을 틀고 있는 앞사람과는 달리 이쪽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습니다. 동시에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행진하는 군인처럼 발걸음이 딱딱 맞네요. 누군가의 삶이 통째로 위협을 당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은 세상천지 아무도 없다는 쓸쓸한 경고처럼 보입니다. 뭉크는 이 그림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제작노트를 남깁니다.

“절규, 나는 대자연을 통과해가는 거대한 절규를 느꼈다.”

이때의 ‘자연’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도 사람 대신 묵묵히 절규를 들어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닐는지요. 보통 남이 내는 다급한 목소리에는 관심들이 없지요. 다른 이의 상처, 절망 따위는 그야말로 남의 일입니다. 어찌 살아가야 될까요. 외롭고 아픈 사람들은요.

선 자리에서 그대로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 삶이지만 살아야 한다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고 뭉크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끝까지 버티었습니다. 그림에 들러붙어서요. “나는 영혼을 해부하듯이 그릴 것이다”라고 끝없이 자기 암시를 하며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 암시는 대체 어디를 향했을까요? 타인의 아픔에는 무관심한 지옥도 같은 세상, 그럼에도 반드시 버텨내야 하는, 그래서 절망을 다시 희망으로 바꾸어야 될, 사람 냄새나는 따뜻한 세상에 대한 암시겠지요.

지난 시간에, 빗대어 표현하는 비유와 달리 상징은 ‘넌지시 건네는 암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작가가 건네는 암호를 해독하려면, 일단은 그림을 ‘잘 읽어야’ 됩니다. 저는 절규를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뭉크라면 저는, 이 작품에 비해서는 덜 알려진 ‘입맞춤 The Kiss(1892년)’이 개인적으론 더 좋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