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기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현장 교육과정의 자율성과 유연성을 위하여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

교육과정 밖 ‘특별 교육’들의 존재 방식 

[에듀인뉴스] ‘경제교육’을 강조하던 때가 있었다. 경제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넘어서서, ‘자유시장 경제의 체제 우월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국가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대개 정책 수행 도구로 교육을 동원하겠다는 발상에는 학교 교육의 본질이 되는 교육과정에 대한 섬세한 이해가 없는 편이다. 

‘경제’가 독립 교과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에서부터, 일선 학교에 특별 과업으로 내려 보낸 경제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보고받고 독려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사회 교과는 이미 운영해 오던 교육과정과는 별도로 ‘경제교육’의 중요성을 특별 트랙으로 운영해야 했다. 기존 교육과정의 처지에서 보면 일종의 파행이다. 30여년 전의 일이다. 

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교육과정 프로세스를 고려하지 않고, 그야말로 특별한 조치로 학교 교육 현장에 투하된 정책적 조치 중에는 1994학년도에 실시했던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큰 방향에서 수능과 교육과정이 바라보는 시선이 같다고 변명을 하지만, 수능은 당시 학교 교육과정에 잘 맞물리지를 못했다. 

수능이 정상적인 입시 혁신정책이라면, 먼저 학교 교육과정의 개정이 있었어야 했다. 현장의 교육과정 운영 리듬에 이런저런 파열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현장의 교육과정 실천 주체인 교사들에게 막막함과 혼란을 주었다. 

실제적인 힘에서 수능은 현실 교육과정보다 세었다. 또 다른 교육과정 하나가 학교에 강림해 온 듯했다. 그러나 수능은 사고력 중심의 평가방식이 혁신적이라는 점이 부담스러웠을 뿐, 새로운 교육 내용을 청구해 온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제도 교육은 그 자체가 권력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국민 일반이 어떤 인식의 힘과 실천의 힘을 길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의 도구적 힘이다. 

특별한 조치로 학교 교육 현장에 투하된 정책적 조치 중에는 1994학년도 실시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사진=kbs 다큐인사이트 캡처)

근대 이후 교육이 지닌 이러한 도구적 힘을 아는 정책(또는 정치) 담당자들은 정책의 수행 수단으로 교육을 동원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 

실제로 정부 내의 다른 부처가 교육부에 정책 협의를 해오는 사안의 상당수는 자기네 부처의 정책을 학교 교육이 특별한 관심과 비중으로 다루어주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해당 분야를 다루는 교과목을 만들어 줄 것을 청하기도 하고, 특정 내용을 일정한 형식으로 일관되게 가르쳐 주기를 주문하기도 하고, 특별 프로그램이나 교과서를 만들어 사용해 주기를 바란다. 

그 나름의 교육적 가치를 갖고 있기에 거절부터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특히 어떤 정책 의제는 해당 부처 수준을 떠나 국가 차원의 의제가 되어서 교육에 반영되기를 강력히 요청해 온다. 

경험했던 것을 열거해 보자.

안보교육, 새마을교육, 경제교육, 인구교육, 국제이해교육, 안전교육, 심폐소생교육, 보건위생교육, 열린교육, 평화교육, 학교폭력예방 교육, 양성평등교육, 미디어교육, 전통예절교육, 진로교육, AI교육, 기후변화교육, 생태환경교육, 지속가능한발전교육, 코딩교육, 민주시민교육, 해양이해교육, 산림이해교육, 다문화교육, 통일교육, 에너지교육, 융합교육, 장애인이해교육, 인권교육 등등이 그러하다. 

교육 본연의 영역인데 특별한 정책적 비중을 띠고 다시 학교 교육 현장에 투하되는 것으로 ‘인성교육’이나 ‘창의성교육’ 같은 것이 있다. 

위에 예거한 교육을 학교 교육에 투하될 때는 정례적인 학교 교육과 특별히 차별성을 갖는 교육을 시행하라는 것인데, 이런 것일수록 시행 과정과 성과를 별도의 방식으로 보고받고 확인하려 한다. 

학교 현장에 투하되는 각종 정책들에 교사는 괴롭다.(사진=픽사베이)

정책 주체 쪽 의욕이 앞설수록, 정상적 교육과정과 조화로운 연계를 외면하기 쉽다. 교육을 도구적으로만 소비하기 쉽다. 이 교육은 특별한 과업이고 매우 중요하고 그래서 특별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과정과의 유기적 순환과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다. 교육과정의 자연스러운 생태를 총체적으로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을 투입과 산출의 단순 회로로만 보고, 교육과정 운영을 기계적 작동으로만 보려 한다. 이런 부류의 교육이 동시다발로 투하되는 데에 현장 교육과정 운영의 어려움이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마찬가지다. 

어느 교장선생님의 하소연...교육과정 '총론'을 왜 직접 가르치려 하나 

며칠 전 SNS에 교장 선생님 한 분의 하소연이 올라왔다. 사려가 깊고 교육을 이해하는 통찰이 깊은 분이다. 그분이 올린 메시지의 톤이 예사롭지 않다. 이런 내용이었다.
 
“국어 시간에, 사회과 시간에, 도덕 시간에, 과학 시간에, 체육 시간에…! 수시로 가르치고 있다고요. 교육부는 (그 내용을) 교육과정에 다 넣었고, 그 교육과정대로 교과서 속에 다 녹여 넣었다고요. 그런데 칸막이로 (서로 격리되어, 그래서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공무원들은 법이 그러하니 따로 가르치고 따로 보고하라네요. 교육부는 타 부처에서 법에 의한 의무교육 요청하면, 교과서를 던져주든지, 교과서를 만들지 말든지….”   <* 괄호 안 내용은 필자의 보충>
                                                                   
이 메시지를 읽은 미디어교육 전공 교수님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사정이 이러니 (내가 관심을 쏟는) 미디어 교육도 교과 교육 안에, 교과서 단원에 반영하지 않으면 학교 현장엔 민폐가 될 수밖에 없다.” 

맞는 말씀이다.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국가 수준 문서 교육과정에는 해당 시기 학교 교육이 추구하여 나아갈 가치와 방향을 밝힌 ‘총론’이 있다. 이 총론에 따라서 각 교과는 ‘각론’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각론 안에는 다시 해당 교과의 학교급별 학년별 목표와 교육 내용과 교육 방법과 평가의 원칙들이 상술된다.

특별한 정책 이슈에 따라 학교에 요청되는 특정의 교육(앞에서 예거했던 교육들)들은 그 성격이나 위상에 비추어 보면 총론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총론을 직접 가르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교과의 각론에 녹아들고, 다시 그 하위의 교육 내용으로 구체화, 체계화되고, 다시 그 하위의 교과서나 활동 책에 녹아들고,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소화하는 일상의 배움 리듬 안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교장 선생님은 교사가 아이들에게 빵을 먹이게 하는 과정을 교육과정 운영의 체계에 비추어 비유적으로 말했다. 그 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빵을 만드는 기초 재료를 교육과정 총론으로 봅니다. 즉 유기농 밀가루와 국산 버터를 정하는 것은 총론의 역할이지요. 교육과정 각론은 그걸로 식빵, 모닝빵, 토스트, 클로아상 등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교과목별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겠지요. 교사들은 그것을 사서 가져와서 아이들에게 구워 먹일지, 생으로 먹일지, 잼 발라 먹일지, 통으로 먹일지, 잘라서 먹일지 등을 진단하면서, 아이들 실태에 맞게 먹입니다. 이는 교사들이 각론에 바탕을 두고 구체적이고 교육 활동을 실천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정책을 담당하는 쪽에서는 그 빵을 사 온 교사에게 국산 버터를 아이들에게 먹였는지 찾아내어 확인하라고 합니다. 빵을 녹여 분석하기 힘드니, 할 수 없이 국산 버터를 사다가 아이들에게 한 숟가락 먹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국산 버터 먹였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아이는 매년 버터 과복용으로 살만 찌게 됩니다. 그럼 또 성인병 문제로 보건복지부에서 교육부로 또 다른 ‘특별 교육’ 요청이 오게 되겠지요.  

2015 교육과정 총론 해설서.  

교장 선생님의 SNS 메시지는 많은 걸 시사한다. 교육과정의 작동은 단순히 기계적 운용이 아니라, 유기체 기제로 운용됨을 너무도 잘 보여 주고 있다. 무슨 큰 사건 하나 터질 때마다 특별 교육을 강조하여, 마치 새로운 교육 내용인 양 가르치도록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미 각론 교과의 교과서에 다 들어간 내용에서 총론을 다시 뽑아내어 그걸 바로 가르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라고 비판한다.

심지어 유치원 아이들까지도 심폐소생술을 연간 2시간해야 하는 조항을 예거하며, 교육 현장을 지원하려면 교육부든 교육청이든 교육과정의 현장성을 알고, 교육과정 공부를 해야 현장 중심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역설한다.

교육과정의 역동성을 확장하라

교육은 그 자체를 목적 가치로 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가치론이 여기에 든다. 인간의 성숙한 발달을 도모한다는 가치가 바탕을 이룬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수단적 가치를 가지기도 한다. 

산업생산의 일선 라인에 일정한 기능 기술을 갖춘 인력을 육성하고 배치하여 산업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가치론이 여기에 든다. 목적 가치와 수단 가치는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선순환하는 양태(mode)가 이상적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개인이나 단위 학교가 교육의 총체적 방향성을 잡고, 그에 따른 교육의 내용을 선정하고 조직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런 이상적 조화를 총체적으로 모색하고, 교육의 목표와 내용과 방법과 구체화하는 일이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개발이다. 

시대와 국가·사회가 교육에 요청해 오는 교육적 과업들의 큰 방향성이 교육과정의 총론으로 집약된다, 이 총론이 추상의 자리에서 구체적 실천의 자리로 내려와 모든 교실에서 살아 있는 활동(activity)으로 구현되기까지 교육과정은 일종의 유기체와 같은 작용을 한다. 

각론으로서 교과 체제를 가지고, 교과 교육과정은 각기 고유한 내용과 방법과 평가로 그 실체를 체계화한다. 그리고 이것을 한 단계 더 실행 모델로 구체화한 것이 교과서, 활동책, 프로그램, 프로젝트 등이고, 이를 실제 교실의 시공에서 책임 있게 실현(realization)하는 것이 교사다. 

이 모든 층위의 내용과 활동들은 단순한 기계적 구도(engineering system)를 넘어서는 것이다. 요소 간, 층위 간 다양한 상호작용과 선순환의 반응이 매우 역동적이다. 그래야 교육 효과를 빚어낼 수 있다. 그러하니 교육과정과는 별개인 양 특정 교육 패키지를 불쑥 투하하면 교육과정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가 망가진다. 그래서 교육과정을 일종의 유기체로 인식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교육과정 안의 각론 교과들도 자신의 고유성만 주장하지 말고, 새롭게 요청되는 특정의 교육 영역과 상호 교섭하고 융합할 수 있는, 교과로서의 유연성을 꾸준히 길러 가야 한다. 

어떤 특정의 새로운 내용의 교육이 들어오더라도, 각 교과가 이를 개방적, 융합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진화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교과의 생태학적 진화라고 할 수 있다. 

교육과정의 이런 역동성이 확장되면, 타 부처의 어떤 정책도 어느 날 학교교육 현장에 투하되어 특별 교육의 자리를 표 나게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교장 선생님의 메시지에 댓글을 달았던 미디어교육 전공 교수님이 다시 댓글을 올렸다. 

“그럼요. 저도 늘 학교 현장 선생님들과 대화하며 답을 찾으려 합니다. 좀 더디더라도 그래야 뿌리를 내리고 지속적으로 실행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