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동반휴직으로 미국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학교생활과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이자, 커다란 쉼표 같은 시간이다. 숨 가쁘게 달리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거리를 두고 보면 놓쳤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다른 각도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국에서의 시간이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교사는 가장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직업군이다. 학교로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이 더 선명하게 보일까?  직접 삶으로 미국 문화를 경험하며 ‘차이’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그 생각을 확장 시키는 과정을 공유하고 싶다.

[에듀인뉴스] ‘쾅쾅쾅!’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남편과 아이는 학교에 가고, 집에 혼자 있는데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낯선 곳에서 가뜩이나 쪼그라져 있었던 나는 깜짝 놀라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 저기 문신을 한 수염이 덥수룩하고 긴 머리를 한 백인 남자였다.

아파트 관리소에서 집수리를 하러 오기로 한 약속이 생각나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거대한 그는 환하게 인사를 건네며 성큼 성큼 집으로 들어왔다.

신발을 신은 채로 말이다! 순간 나는 당황해 손을 휘저으며 짧은 영어로 신발을 벗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흔쾌히 알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조금 후 그가 다시 들어왔을 때 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는 여전히 신발을 벗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발을 덮는 덧신을 신고 온 것이다!

덧신을 신고 들어온 그는 집안을 돌며 친절하게 수리를 해 주었다. 그리고 하나씩 수리가 끝날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Sweet”이라고 말했다. 겉모습만 보고 가진 경계심은 친절하고 스윗한(?) 그의 모습 덕분에 수그러들었다.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고 그 ‘스윗가이’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신발을 벗기가 그렇게 싫을까? 세상에, 신발을 벗어달라고 했더니 덧신을 신고 왔다니까!”

이와 같이 내가 경험한 것과 다른 상황을 맞닥뜨릴 때 마다 나는 ‘이 곳 사람들은 왜 그런 거야?’ 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름’을 경험하기 위해 미국에 작정하고 온 만큼, ‘다름’에 대한 생각과 반응이 왜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 집중해 보고 싶었다.

내가 경험한 것, 익숙한 것에 맞추어 세상을 볼 때 그것과 다른 것은 ‘이상한 것’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당연함’이 나에게는 ‘이해 할 수 없음’이 된다.

‘공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까지 내가 했던 공감은 어디까지나 비슷한 상황 속에서만 했던 좁은 차원의 공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포틀랜드 다운타운은 명품 브랜드 매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다.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은 채 노숙자들의 텐트 수가 늘어가던 거리. 아픔만 남은 거리에 아픔이 더해진다.(왼쪽=포틀랜드 다운타운 전경, 오른쪽 사진=유튜브 캡쳐)
포틀랜드 다운타운은 명품 브랜드 매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다.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은 채 노숙자들의 텐트 수가 늘어가던 거리. 아픔만 남은 거리에 아픔이 더해진다.(왼쪽=포틀랜드 다운타운 전경, 오른쪽 사진=유튜브 캡쳐)

다른 인종이 적은 나라, 교사라는 특수한 집단. 내가 경험한 세상에서의 공감은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타국에서, 다양한 인종을 공감하려면 내 인식 속에 선명하게 이등분 되어 있는 인식의 구조를 바꾸어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명확하게 서양과 동양이라는 개념에 선을 그어 놓고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분법은 세계를 인식하는 한 방식이다. 인간이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것은 인식의 편리함 때문이다. 복잡한 세상을 효율적으로 보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는 그 해석을 단순화 시키고 편협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양한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지금 이 글도 ‘글’로 표현하기 위해 대립을 내재하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말과 글에 이분법적 인식이 스며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지만, 딱히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이분법은 개별화시켜 보는 것을 방해하고, 촘촘하게 보는 섬세함을 잃게 한다. 나아가 다른 것은 배제하거나 혐오하고 왜곡해서 보게 한다.

서양과 동양, 백인과 유색인종, 자국인과 외국인. 이렇게 단순하게 나누어 구별 짓는 것은 개별적인 존재를 잊게 만든다.

백인 남성, 타투를 한 사람, 수염을 기르고 긴 머리를 한 남성. 나는 그를 직접 만나기도 전에 문구멍 틈으로 본 그를 단순하게 판단해버렸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 다른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를 이해하고, 이곳 사람들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나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인식을 바꾼 다는 것은 쉽지 않다.

미국은 역사 자체가 수많은 인종과 종교, 성별, 문화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이었다. 흑인노예 해방, 페미니즘 운동 등은 기존의 인식을 힘겹게 바꾸며 역사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여전히 이분법적 시각,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사진=이다정 교사)

지금 미국은 혼돈 그 자체다.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라는 흑인남성이 백인경찰의 무릎에 눌려 질식사 한 사건으로 인해 곳곳에서 항의시위가 이어지며 야간통행금지령까지 내려졌다.

코로나 19로 인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서 ‘음성과 양성’으로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부와 가난’, ‘흑인과 백인’ 등으로 분열하며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항의시위가 약탈과 방화로 이어지며 명분을 잃고 본말전도 된 폭동으로 흘러가는 양상은 매우 안타깝다. 조용한 도시 인줄 알았던 이 곳 포틀랜드에서도 상점을 파괴하며 폭력적인 방식의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혼돈의 틈을 비집고 작은 희망을 바라본다. 조지 플로이드를 애도하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흑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부색에 상관없이 한 생명의 무고한 죽음을 애도하고,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며 정의를 위해 함께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타인의 죽음을 간접화 하지 않고 나의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남의 나라 이야기였을 지도 모르는데 나 역시 이리도 가파른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이분법적 인식이 조금은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다행히 주거지는 다운타운과는 달리 평화롭다. 집 앞에 쌓아 놓은 나무 장작이 보인다. 얼마 전 이웃집에서 나무 한 그루 분량의 장작을 싣고 와서 쌓아 놓은 것이다.

차곡차곡 쌓인 나무를 보고 “엄청 많네요!” 라고 했더니 이웃 아저씨는 땔감이 필요하면 언제든 가져다 쓰라고 한다. ‘서양은 개인주의’라는 고정된 인식 때문에 그들에겐 정(情)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한 번 내 인식 속에 그어 놓은 선이 느껴져 부끄러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갈라놓는 지금, 우리에게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것은 구분 짓는 것이 아닌, 공감과 화합이다.

이다정 경기 신능중 교사
이다정 경기 신능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