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05)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계한 민주주의와 선동정치
[민주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05)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계한 민주주의와 선동정치
  •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1.1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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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가장 보편적인 가치와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한 마디로 설명하고자 하면 선뜻 입이 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체계는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에서 완벽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민주주의가 교육 현장에는 어떻게 스며들고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에듀인뉴스> 이돈희 발행인은 민주주의의 개념적 내포와 외연의 진화적 과정, 그리고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의미론적 검토, 주요쟁점의 확인, 실천적 문제의 분석 등을 이야기하는 연재를 통해 교육현장적 여건과 문제를 규명하고 실천적 가능성과 한계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학문 전반에 걸친 백과전서적 학자로서 과학 제 부문의 기초를 쌓고 논리학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트라키아의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여 플라톤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왕자 시절의 알렉산더 대왕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B.C. 335년에 자신의 학교를 아테네 동부의 리케이온에 세웠는데, 이것이 페리파토스 학파(peripatetics : 소요학파, 逍遙學派)의 기원이 된다. 그는 플라톤의 비물체(非物體)적인 이데아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동요하였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과학 제 부문의 기초를 쌓고 논리학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트라키아의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여 플라톤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왕자 시절의 알렉산더 대왕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B.C. 335년에 자신의 학교를 아테네 동부의 리케이온에 세웠는데, 이것이 페리파토스 학파(peripatetics : 소요학파, 逍遙學派)의 기원이 된다. 그는 플라톤의 비물체(非物體)적인 이데아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동요하였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국가와 나쁜 국가를 구별하였지만, 국가의 통치체제를 구별하는 기준에 있어서 플라톤과는 다소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를 기준으로 하여 이에 비해 열등한 수준별로 분류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의 여러 형태들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열거하였다.

그 방식은, 통치의 주체인 구성원의 수가 일인이냐, 소수이냐, 혹은 다수이냐에 따라서 구별하고, 그 각각을 다시 공적 이익을 지향하는 이상적 형태와 사적 이익을 위한 타락한 형태로 분류하였다.

(표=이돈희 교수)
(표=이돈희 교수)

위의 표에서 잠주정체(蠶主政體)는 잠주 한 사람의 이익을, 과두정체(寡頭政體)는 부유층의 이익을, 그리고 민주정체는 빈민층의 이익을 위한 정체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지금보다는 규모에 있어서 훨씬 작은 수준이었으므로, 민주정체는 모두가 함께 개방적 의회에 참여함으로써 직접 통치하는 체제이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규모가 큰 경우나 작은 경우에나 투표를 통하여 누구나 통치에 참여하는 제도이다. 말하자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합법적인 시민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플라톤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은 귀족층이나 부유층이 아닌, 빈민층이 통치권을 장악한 사회였다.

가장 자연적이고 단순한 공동체인 가정은 번식을 위해 결합할 남녀의 한 쌍으로 성립한다.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정들로 구성된 최초의 공동체가 마을(부락)이며,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이다.

국가가 형성되면 그 공동체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최고수준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국가는 단순히 생존을 위하여 형성된 것이지만 구성원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위의 공동체들이 자연스런 것이라면 모든 국가도 자연스런 것이다.

국가는 최종목표이고 최고의 가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이라고 하였다.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지만 개인과 가정에 우선한다. 국가가 완성되기 전에도 인간은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e)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 된다.

무장한 불의는 가장 다루기가 어렵다. 인간은 지혜와 덕성(aretē)을 위해 쓰도록 언어와 도구들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덕성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불경스럽고 가장 야만적이며, 색욕과 식욕만을 가장 밝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특징 중의 하나이며,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 주고, 무엇이 옳은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을 제공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특정한 통치체제가 절대적으로 좋은 국가를 만든다고 규정하지도 않았고, 이상적 국가의 절대적 그림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는 이상적 국가는 특정한 형태의 국가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정치학'에서 일인의 통치나 다수의 통치나 간에 여러 체제의 각각이 성공적인 국가가 되기 위한 도덕적, 구조적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로 다수, 특히 빈민들이 통치하는 민주정체를 중심으로 한 혼합적인 형태까지도 검토하였고, 그것이 바로 위의 표에서 명시된 입헌체제(politeia, polity)다.(입헌정체라는 번역은 꼭 적절하지는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상대적으로 가장 좋은 정체를 모색하면서 칭한 국가를 “Politeia”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냥 “입헌정체”라고 번역해서 큰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체제를 일종의 혼합체제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듯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민주체제와는 대조적으로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체에 관해서 그것이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정치학 4권 4장)


먼저, 적어도 국가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농부, 기술자, 상인, 기술직, 전사, 재산가, 공직자, 법조인 등의 여러 기능적 계층들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이런 조건의 국가 구성원들이 제대로 작동하자면 탁월한 정치가가 요청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부문에 요구되는 이런 재능들을 같은 사람이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실상은 효율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같은 사람이 전사(戰士) 겸 농부 겸 기술자가 될 수 있고, 나아가 법률 심의자 겸 재판관도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두들 자기는 정치가로서 뛰어난 자질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정체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것은 바로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같은 사람이 가난하면서 동시에 부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부자와 빈민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본질적인 구성요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적고 빈민은 많은 까닭에 이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보이고, 어느 쪽이 우세하냐에 따라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체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면 결국 생각할 수 있는 정체가 가난한 집단을 중심으로 한 민주정체와 부유한 계층을 중심으로 한 과두정체, 이 두 가지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국가의 정체를 운영할 민중이나 귀족의 어느 쪽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양하기로 말하면 마찬가지이다. 민중의 편에서 보면 농부, 기술자, 상인 등도 또 다시 분류가 가능한 많은 다양성이 따르고, 귀족의 편에서도 재산, 가문, 교육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그러므로 귀족이 중심이 된 과두정체가 아니라 빈민이 중심이 되는 민주정체도 취할 수 있는 여러 유형들이 있다.


첫째 유형은 평등의 원칙에 근거한 유형이다. 빈민이든 부자이든 어느 쪽도 우선권을 가지고 다른 쪽을 지배하지 못하는 대등한 정치적 참여가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빈민이 다수이고 부자가 소수이므로 결국 민주정체로 기울게 된다.

둘째 유형은 재산등급에 따라 공직을 배분하지만, 그 요건을 매우 낮추어 극빈의 수준이 아니면 공직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체제이다.

셋째는 법으로 정한 결격사유가 없는 시민이면 공직에 참여할 수 있는 체제이다.

넷째는 법의 지배를 받는 모든 시민에게 공직이 개방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법 대신에 대중(plethos)이 민중선동가(demagogos)에 의해서 형성된 최고권력을 행사할 때 발생한 체제이다. (정치학, 4권 4장)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실제 민주국가는 매우 양극화된 사회이다. 부유층과 빈곤층이 있을 뿐이고 그 중간, 즉 지금의 중산층의 개념이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민주국가가 이루어야 할 중요한 정치적 과업은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을 너무 많이 축적하여 그 위세가 두드러져 보이는 사람은 일시적으로라도 도시국가에서 추방당한다.

분위기는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플라톤의 경우만큼 악평하지는 않았다.

이유인즉, 유추해 보건대, 하나는, 인간사회가 이성적 존재들의 공동체인 이상, 누구도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대열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불완전하지만, 어떤 의미의 민주적 장치를 거부하지 말아야 했다.

플라톤의 이성은 소수 인간의 속성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이유의 다른 하나는, 바로 그는 대다수 혹은 대중의 지혜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수를 개별적으로 보면 특별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보다 열등하지만, 그 다수의 지지로서 나타내는 지혜는 소수의 전문가들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욱 나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절차와 전략이 합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모든 사회는 필요에 따라서 통치의 규칙을 발전시켜 나가야하기 때문에, 다수에 의한 결정은 유익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어느 공동체에서나 다소 항구적 구속력을 지니는 법률체제가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 따라야 하는 것이 중요하며 소수나 다수가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도 하나의 법률체제를 철칙으로 삼고 영구히 유지해 갈 수는 없다. 법률은 단지 개괄적으로 규정할 뿐이고, 항상 변화하는 상황에 구체적으로 대비하는 규칙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성문법에 의한 정치를 가장 탁월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통치자는 물론 법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하지만, 상황에 적응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의 통치는 소수의 통치보다 덜 부패할 수 있고, 변화에 가장 융통성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체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바로 플라톤도 그랬듯이, '선동정치'와 같은 극단적 민주주의이다.

부유층과 빈민층이 양극화된 상태라는 것만 아니라, 민주정체의 다양한 계층이 서로 이해관계로 얽혀져 있으면, 자칫 여러 형태의 선동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높게 마련이다.

선동정치는 법률이 아니라 군중이 최고의 세력을 장악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 군중의 선언은 때때로 법률을 초월한다.

군중의 선언에 의하여 법률을 초월하고 모든 것은 선동된 군중의 집회에 회부한다. 그리고 선동에 동원되는 군중이 일단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면 그 위세는 더욱 더 커지고, 선동에 매인 군중은 하나의 강력한 타성을 형성한다.

모든 것이 그들의 손에 있고 대중의 투표도 그들이 장악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입안되는 모든 통치의 규칙들은 군중의 선언에 의해서 시행된다.

이러한 체제는 다수의 결정이란 점에서 형태상 민주적 체제일 수는 있어도, 실질적 의미의 민주주의, 즉 빈민층을 포함한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영구히 보장하려는 정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언이라는 것은 단지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잠정적 규칙일 뿐이기 때문이다.

선동정치는, 결국 폭동이나 혁명과 같은 일종의 유사 민주적인 세력에 의해서나, 새로이 등장하는 다른 세력의 강력한 저항과 투쟁하면서 쇠퇴하거나, 민주주의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세력에 의해서 사멸되기도 한다.

21세기에 이르러 소위 민주국가라고 표방하는 국가, 비록 고도의 법치주의가 실천되고 교육의 수준이 높은 선진국가에서도 실제로 선동정치가 일상화된 경우는 쉽게 관찰된다.

어떤 점에서 사상과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출판과 주거와 이동의 자유 등이 보장된 사회, 특히 유연성과 개방성이 높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선동과 선동정치의 양상은 다양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이념적, 제도적, 규범적 가치의 허용적 특징이 선동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생활 현장의 풍토를 지배할 때, 민주주의가 목표로 약속하는 개개인의 성장과 공동체의 안정과 인간사회의 번영을 위한 과업들은 심각한 장애를 받는다.

선동정치가 난무하는 민주 국가는 자체모순의 국가이다. 선동적 정치의 분위기는 우려되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빈번하게, 어쩌면 끝없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며,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불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국가의 제도적 설계와 같은 체제적 구조로만 생각하는 편협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연하게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전진하는 생활의 규범과 원리를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몸으로 익히는 체계적 교육이 실천되고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적 행동과 생활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협동하는 규칙을 함께 실천하면서 창조적 삶을 함께 영위하는 것이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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