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위해 한 목숨 바친 선열들의 동선이 내 인생의 동선이 됐다

2008년 중국에서 유학할 때였다. 우연히 친척 집에 있었던 김구 선생님의 자서전 ‘백범 김구’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상해의 임시정부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인 훙커우 공원을 거쳐 만주를 여행하면서 봉오동과 청산리 등 독립 운동가들을 길러내던 학교 등을 찾아다녔다.

중국 용정의 산꼭대기에 있는 일송정, 지금은 소나무 하나와 정자를 세워놓았다. 사진=옥승철
중국 용정의 산꼭대기에 있는 일송정, 지금은 소나무 하나와 정자를 세워놓았다. 사진=옥승철

만주 - 일송정을 거쳐 윤동주 생가로

같이 여행하던 친척들과 일송정이라는 정자를 방문한 때가 기억이 난다.

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 가사는 ‘선구자’라는 우리나라의 가곡의 한 부분이다. 어느 독립 운동가의 한(恨)을 나타냈다고 한다. 일송정은 만주 용정이라는 한인 마을 산꼭대기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독립 운동가들은 때때로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산 꼭 데기의 일송정 아래에 앉아 드넓은 만주 벌판과 해란 강을 내려다보며 독립에 대한 마음을 다잡곤 했다고 한다.

일송정이 있는 산에서 내려와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明東村)으로 향했다. 명동촌이란 조선에 광명을 가져다준다는 뜻으로 1899년 한학자 김약연이 국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 북간도로 이주하여 세운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는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사상적기반으로 많은 독립운동가와 진보인사가 활동하면서 명동촌은 민족주의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명동촌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였다. 하지만 이 두 전투가 치러진 후 일제는 1920년 10월 20일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북간도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사진=옥승철
북간도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사진=옥승철

윤동주는 1917년에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가 어우러진 이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4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문학소년을 꿈꾸던 그는 소학교 5학년때부터 친구들의 글을 모으고 편집하여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문학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윤동주는 1943년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조선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고 옥사하게 된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단 한편이지만 주옥같은 시를 남기게 된다.

상해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만주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상해로 떠났다. 상해로 간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간부들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던진 장소 ‘훙커우 공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루를 꼬박 기차를 타고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하였다. 한국인의 방문이 많았을 텐데도 이상하게도 중국인 택시 기사는 상해임시정부의 위치를 잘 몰랐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앞에서 사진을 찍은 필자. 사진=옥승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앞에서 사진을 찍은 필자. 사진=옥승철

어렵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 나는 뜨거운 애국심과 슬픔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그때의 느낌을 기억한다. 김구 선생님의 항일 근거지이기도 했던 상해의 임시정부는 그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항저우, 광저우를 거쳐 서쪽으로 충칭까지 이르게 된다.

임시정부 방문을 마치고 곧바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장소인 훙커우 공원으로 갔다. 상해 훙커우 공원은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잔치와 상해 점령 전승 기념행사가 열린 곳으로 청년 윤봉길이 폭탄을 던진 곳이다. 윤봉길이 던진 폭탄이 터져 일본군 수뇌부의 대부분은 죽거나 중상을 입는다. 이번 의거로 인하여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면서 조선의 독립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내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2년 뒤인 2011년, 당시 일본과 우리나라는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일본에 가고 싶어졌다. 일본에 가서 일본에 대해 배우고 일본의 역사 인식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일본 교환학생으로 동경에 있는 호세이 대학(법정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뭐라고’ 생각하면서 피식 웃기도 하지만 그때 당시 나는 20대 초반의 왕성한 혈기를 자랑할 때였다.

일본 동경 YMCA 2.8 독립선언 기념관에는 독립선언을 주도학 유학생들이라는 사진과 함께 관련 설명이 안내되어 있다. 사진=옥승철
일본 동경 YMCA 2.8 독립선언 기념관에는 독립선언을 주도학 유학생들이라는 사진과 함께 관련 설명이 안내되어 있다. 사진=옥승철

일본 – 2.8 독립선언과 야스쿠니 신사

일본 동경에서 공부할 때 학교 한인회 총회장이 우리 학교에서 선출되었다. 한인학생회 총회장은 동경 YMCA 건물에 사무실을 쓸 수 있는데 이는 동경 YMCA가 예전부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이유였다. 일본 한인학생회는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동경 조선청년독립단의 후예였다. 동경 조선청년독립단은 동경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유학생 6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2.9 독립선언서를 일본의회에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2.8 독립선언은 곧장 국내의 민족지도자와 조선 국민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 중 우연히 큰 신사(神社)를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어떠한 신사인가 했지만 전시된 전쟁 품들을 보며 이 곳이 야스쿠니 신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곳을 둘러보면서 가슴속에 슬픔과 울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중국에서의 감정은 슬픔이었다면 야스쿠니 신사에서의 나의 감정은 내가 겪지 않았어도 내 선조들의 DNA에 각인되었던 한(恨)이었다. 나는 공부가 지겨울 때면 이곳으로 산책을 나와 마음을 다잡곤 했다.

일본 학생들과 위안부에 관해 토론하다

나는 당시 일본의 정치와 역사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일본의 근대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의 수업 PPT에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테러리스트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당황하고 분노하였지만 그래도 일부러 일본 측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았다. 교수는 계속 설명하면서 2차 세계대전 때의 한국인 강제노역은 없었으며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이 일본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위안부가 자발적이고 정당하며 돈을 충분히 지급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교수는 그 증거로 위안부 모집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나는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일본의 입장은 이렇다. 1944년 일본은 위안부를 모집하기 위해 거금을 준다고 하는 보도 자료를 뿌렸다. 그래서 많은 여자가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지원하였다. 또한 위안부가 강제 연행된 문서화한 증거가 없다는 게 핵심 논리였다. 그럼 지금까지 살아계신 피해자 할머니들의 말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오로지 문서만 증거가 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 일본이 강제연행을 인정한 건 한국의 강요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듣는 내내 울컥했다.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예전에 우연히 읽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떠올랐다. 나는 교수가 내 의견을 물을 것을 알고 머릿속에서 할 말을 되뇌고 있었다. 곧 나는 질문을 받고 말했다.

이 문제는 좀 민감한 사항이지만 예전에 제가 읽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할머니는 17살 때 일본인이 와서 군수공장에서 일하면 많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그 사람을 따라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트럭에는 그녀와 같은 상황의 조선인 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을 데리고 간 곳은 일본군인들의 진지였습니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강제로 하루에 많게는 30명씩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망가다 잡히거나 임신이 되면

그 자리에서 칼에 찔려 죽는 건 다반사여서 그녀들은 그곳에서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군은 위안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위안부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한 사람의 일본군 간부가 탈출하라고 미리 알려주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들은 몸이 망가져 임신도 못 하고 평생 결혼도 없이 쓸쓸히 살아야 했습니다.

같은 반의 일본 여학생들은 때로는 놀라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말한 것들에 대해 처음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학생들은 내 말에 반신반의하였다. 하지만 내 말을 믿어주는 일본 친구들도 있었다.

이처럼 일본의 역사 교육은 철저히 일본 자국의 역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조그마한 반성의 기미도 역사 교육에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우경화되고 군국적인 역사교육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근대 역사를 정의롭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일본이 진실한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사과와 반성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인정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일본의 역사 교육에는 그들의 잘못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일본학생들과 독도가 각기 자신의 나라 것이라는 이유를 말하는 프레젠테이션도 해보고 재일 학생들도 만나 근대 역사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일본 우익에 쫓겨보기도 하는 등 많은 일이 있었다. 내 인생의 방향성을 정해준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과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보았던 독립운동의 동선은 곧바로 내 인생의 동선이 되었다. 내 인생에 군 복무는 없다고 철없이 떠들던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공군 장교에 지원해 합격하였다. 입대 전 서울에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이봉창 등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에 들러 지난 4년간 중국과 일본에서 보고 느꼈던 순간들을 그분들과 공유하였다. 그분들의 삶의 동선을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글 옥승철 한국청년정책학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