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두 서울 숭문고 국어교사, (전) 대통령직속교육개혁위원

  

1. 자기 집 약도를 정확하게 그린 다음, 외국인이 자기 집을 찾아올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상세한 안내의 글을 쓰라.

2. 다음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쓰라.

1) 우리 사회에는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많다. 자기 주변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 지적하는 글을 쓰라. 가능하다면 대안까지 쓰라.(띄어쓰기 포함 대략 400자 이상)

2) 인생에는 희로애락, 즉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직업 학교에 다니면서 있었던 이들(Episodes)을 ‘희로애락’을 중심으로 상세하게 쓰라.(띄어쓰기 포함 대략 400자 이상)

3. 다음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쓰라.

1) 최근 우리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으나, 과정에 충실하기보다는 결과의 화려함만을 중시하는 얄팍한 사고방식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과정에 충실히 하는 삶이 가치 있다는 주제의 글을 쓰라. (띄어쓰기 포함 대략 600자 이상)

2) 30년 후 자기 아들이나 딸에게 주는 편지의 글을 쓰라.(띄어쓰기 포함 대략 600자 이상)

위의 문제들은 1995년도 1학기 말에 제가 출제한 고3 직업 과정 국어시험입니다. 100% 서술형 국어 시험이었지요. 50분에 2가지 종류의 글을 도합 1천자 이상 쓰고, 외국인이 알아볼 수 있게 간단한 외국어로 자기 집으로 찾아올 수 있게 약도를 작성하는 내용입니다.

직업 과정, 곧 고3이면서 월요일만 학교에 오고 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는 직업학교에 가서 위탁교육을 받는 것을 선택한 학생들에게 냈던 시험입니다. 자세히 읽어 보시면 나름대로 아이들의 삶과 미래를 걱정하며 출제한 제 의도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IB(International Baccalareaute-국제바칼로레아) 교육 과정과 평가 시험이 만병통치약인가

최근에 이른바 IB 교육 과정과 평가 시험을 만병통치약처럼 과장하며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IB는 대학입시 대신 취업하겠다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교육과정과 평가문제가 알차게 준비되어 있을까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십중팔구 없습니다. ▲설령 있다 치더라도 25년 전에 제가 낸 문제의 수준과 철학이 IB의 그것들보다 그렇게 많이 뒤떨어질까요? ▲그 이후 지금까지 국어교사로서 노력해 온 저나 현장의 수많은 교사 수준이 IB를 당장 수입해야 할 만큼 현격하게 모자랄까요?

대학입시 제도를 서술형 평가로 바꾼다고 교육개혁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외부의 평가 체제를 끌고 와 내부의 생태계를 바람직하게 만든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입학사정관제까지 포함하여 도입한 지 10여 년에 가까워져 오는 ‘학종’조차 제대로 정착하기 어려운 우리 현실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설령 IB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대학입시에 연계하는 순간, 성공적으로 실현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단순한 오해일까요? 대학 입시와 연계되면서 성공한 교육이 우리에게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요?

독해 중심의 독서를 학생부 기록 중심의 입시 평가와 연관시켰으나 독서문화는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수많은 사교육비까지 쏟아 부어지는 영어 교육은 성공했나요? 영어로 기초적인 회화나 일기, 메모, 이메일 작성을 제대로 할 수 있나요? ‘수학의 정석’ 같은 급속 문제풀이식 수학 시험은 수학적 사고력을 키워주기는커녕 그 즐거움마저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과학 교육과 사회 교육, 문화 예술 교육 또한 바로 대학 입시와 연관되면서 늘 왜곡되거나 외면되기 일쑤였습니다. 입시와 연관시키는 교육 개혁은 언제나 매우 신중하게 임해야 합니다.

IB를 도입하면 장밋빛으로 우리교육이 바뀔 거라는 주장은 지나친 과장과 왜곡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뿌리에 숨은 평가 만능주의는 더욱 위험합니다. 누구도 미래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문명의 대전환기에 예나 다름없이 입시를 바꿔야 교육이 바뀐다는 식의 사고를 묵수하는 태도는 현장의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식의 발상에 우리 사회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덜컥 맡길 수는 없습니다.

IB 도입, 결국 극소수 학생들이 혜택 받아 입시 유리점 독점

IB를 도입하여 우리 교육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의 본질은 아주 간단합니다. 현재 IB를 준비하거나, 앞으로 준비할 극소수 학생들을 위해 공교육 입시체제를 또 한 번 크게 뒤흔들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IB를 자비부담으로 받아들였던 극소수의 학교와 학생들만 공교육 예산의 막대한 혜택을 받고 입시의 유리한 고지를 독점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입시교육 관계자들은 학종과 수능, 논술 등 기존 대입평가 방식의 문제들을 지적하며 변종 괴물이 될 IB를 만능 해결책인 듯 미화하고 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졸속이고 하향식으로 진행하면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결국 개악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나 많이 개혁을 말하면서도 개악이 되는 현실을 너무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다. 대학교육이 현재 엉망이라면서 중등교육의 개혁이 중요하다고 나서고, 이는 IB를 도입하면 모두 가능하다는 주장은 억지입니다.

정녕 우리 사회와 학생의 미래를 위한다면서 IB를 경험하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은 왜 마련하지 않나요?

IB가 그리 좋다면 IB로 대학에 진학할 학생들을 위한 연계형 대학교육개혁 플랜을 체계적으로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기존의 IB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우리 교실의 모든 아이를 위해서 또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IB 도입?..."공교육 현장 자산 찾아내 가꾸는 일 먼저 지원해야"

진정한 교육 개혁을 위해 졸속이고 일방적인 IB 도입 주장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현장의 아이들을 위해 먼저 노력해야 할 것들을 외면한 채로 일부 교육 평론가들과 몇몇 교육청이 앞장서서 하향식으로 현장에 강요하는 식은 더 곤란합니다.

외국에서 완벽하게 검증되었다며 유일한 정답인 듯 교육과정과 평가체제를 국가 수준에서 도입하고 대입 평가용으로 고교 현장에 즉각 도입할 것을 사실상 강요하는 태도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교육을 이식하면 지금까지 기껏 쌓아온 현장의 여러 노력과 성과들마저 무너질까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책 쓰기 교육과 봉사활동학습 확산, NIE(신문활용교육)를 비롯한 매체이해교육(미디어 리터러시), 지역과 연계되는 민주시민 교육 등 우리 공교육 현장의 굵직한 자산들을 철저히 일구고 새싹 또한 차근히 찾아내어 제대로 가꾸는 일을 해야 합니다. 현장에 뿌리를 두고 가지를 펼치는 교육개혁만이 우리 교육과 아이들의 장래를 제대로 밝고 따뜻하게 만들 것입니다.

허병두 숭문고 국어교사, (전)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회 위원
허병두 숭문고 국어교사, (전)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