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배낭에 담을 ‘세계 시민성’이 없다③

[에듀인뉴스] 나는 1980년, 그 해를 살았다. 그게 역사가 된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나는 2020년을 살고 있다. 올해가 새로운 역사가 되리라는 예감이 강렬하다. 시대와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ungeun_87&amp;logNo=220436660113&amp;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br>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ungeun_87&amp;logNo=220436660113&amp;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시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것을 맡기라. 경제주체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방임하라. 그러더라도 가격기구를 통해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질 것이고, 결국 경제 전체에 질서를 가져오고 부와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제발 정부는 그 ‘보이는 손’ 좀 치우라. 국방이나 치안 등 야경꾼 노릇이나 하고 가만히 있으라.

오래전 고등학교 시절 <일반사회> 시간에 신물 나게 들었던 내용이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습격한 지구촌은 배운 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가만히 두어도 다들 착착 돌아갈 거라고 시장은 호언장담했는데, 아니었다. 길거리에 던져진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렸고,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다 죽게 되는 상황이 여기저기서 펼쳐졌다.

최악의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덮쳤는데도 ‘보이지 않는 손’은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밤거리를 순찰하는 정도의 역할만을 요구받던 정부가 팔을 걷어붙인 건 그 무렵이었다.

공기 중에 산소가 5%만 부족해져도 살 수가 없다는데,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없다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자, 산소통을 들고 나타난 것은 시장이 아니라 정부였다.

없는 사람들에게 산소는 먹고살 돈이다. 미국도 중국도 유럽도 과감한 재난 지원에 나섰다.

그러면서 국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산을 통제한다며, 공항을 폐쇄하고, 통행금지를 발동하고, 집회 금지를 명령하며, 이동 제한을 강제했다.

수십만의 주검이 나뒹구는 모습에 질린 지구인들은, 집회의 자유도 이동의 자유도 종교의 자유도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단체인 국가가, 대리인인 정부를 내세우며 역사 전면에 나선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신자유주의가 강요했던 ‘작은 정부’가 몸집을 불려 ‘큰 정부’로 귀환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사진=KBS 캡처)
(사진=KBS 캡처)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코로나에 의해 국가가 소환되면서, 국경이 없는 세계에 다시 국경이 만들어졌다. 자국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은 죽음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향해 누군가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부추겼다.

그러면서 코로나 퇴치를 위한 지구적인 방역 협력은 뒷전으로 밀렸고, 공공재로 공유되어야 할 백신마저 가진 나라들이 독점하는 등 백신 이기주의로 치닫는 형국이 펼쳐지고 있다.

지구의 미래를 보고 지구 공동체의 안녕을 위하는 대국적인 안목은 사라지고, 자국만을 보고 자국민만을 생각하는 자국 위주의 사고방식이 세계를 또 다른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세계의 더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지구는 반드시 함께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내 나라만 살겠다고 나서다가는 모든 나라가 다 죽는다는 것을,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코로나19의 백신과 치료제는 이미 무기화의 수순을 밟고 있고, 코로나19와 관련된 고급 정보들은 자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에 치명타가 되는 비대칭 무기로 작동할 수 있다는 암울한 예측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눈앞의 코로나19를 단지 백신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는다. 기후변화로 인해 신종 감염병의 발생 주기가 빨라졌고, 앞으로도 그 주기가 더욱 빨라질 것이다.

지구는 이미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3년 조류인플루엔자, 2014년 에볼라, 2015년 메르스, 2016년 지카 바이러스를 겪었고, 그리고 2020년 현재 코로나19를 겪고 있다.

다음 신종 감염병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언제 지구촌을 덮칠지 알 수 없는 생태 파괴적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한 지역 혹은 한 국가에 소속된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나’는 자연계까지 끌어안은 더 큰 세계에 단단히 얽혀 그 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존재라는 각성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이제는 상식이다.

나는 너이고 우리여야 한다는 사실, 우리는 세계이고 자연이어야 한다는 정언명령 앞에 인류가 부복하지 않으면, 지구라는 녹색먼지는 정말 먼지처럼 흩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이미 반역이다.

모든 나라가 힘을 모아 서로의 차이를 떠나 범지구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인류는 대재앙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가

낙관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2020년이 백신 없이 코로나를 견딘 해라면, 2021년은 백신과 함께 코로나를 견디는 해가 될 것이라고. 하여 2022년은 다시 시장이 귀환하고, 드디어 2023년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화려한 원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비관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백신 하나로 지구촌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것 같으냐고. 그래, 국제적 연대와 협력으로 3년 안에 전 세계의 인구가 백신을 접종한다 치더라도, 그리하여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치료제가 개발된다 치더라도, 언제 덮칠지 모르는 변이된 바이러스가 만들어 낼 더 큰 공황에는 인류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비관주의자는 계속하여 말한다.

백 보 만 보 양보하여 인류가 모든 걸 잘 대처했다 치자. 그렇게 하여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갔다 치자. 그런데 그때 다시 돌아온 자본이 갑자기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으냐고. 거대한 자본의 힘에 주눅이 든 정부가 ‘인간의 편’에 설 것 같으냐고. 그 누구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본이, 그 자본의 정부가, ‘인간적인 모습’을 지닐 것 같으냐고. 신자유주의보다 더한 신신자유주의가 되어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을 누가 하느냐고. 그것이 코로나19보다 더욱 끔찍한 재앙이 될지 누가 아느냐고.

시장이 떠난 자리에 빅브라더의 모습으로 정부가 귀환했다. 하지만 그 언젠가 정부가 떠날 그 자리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시장이 빅브라더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정말 아니다.

시장이건 정부이건 자본이건 국가이건 간에 시민적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지구촌의 미래는 없다. 나만 보지 않고 우리를 보게 할 수 있는 눈이 없으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 암울하기 짝이 없다.

눈앞의 현실만 보지 않고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면 호모사피엔스에게 22세기는 없다, 진짜 없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 ‘세계시민’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사람은 있는가

우리는 한때 종교에 ‘사람’을 기댄 적도 있었다. 그래도 종교는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을 것 같았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거기 있을 것 같았다. 종교에는 자본에 포획되지 않을 어떤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토록 말리고 말려도 스스로 방역의 사각지대가 되어 감염의 꼬리를 이어가는 종교인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태복음 12장 7절) 하는 예수의 음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무지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인데도, 굶주린 나머지 이삭을 잘라 먹는 이웃들의 배고픔을 껴안은 청년 예수의 자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검은 하늘에 점점이 박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붉은 십자가들이 저 멀리 하늘의 푸른 별빛까지 밀어내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종교에 눈감았다.

그러면 어디에 길이 있는가? 길 같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새가 다니는 사람, 별이 다니는 사람,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깃들어도 되는 사람, 그런 생명과 평화와 자연은 어디에 있는가? 자본에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사람들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맞다. 평생 그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는 나로서는, 그곳밖에 알지 못한다. 그곳이 바로 학교다.

일곱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때 묻지 않은 순수가 폭풍과 노도와 함께 있는 곳이, 아직도 그곳이다. 그래서 시선을 결코 거둘 수 없는 곳이, 학교다. 교복을 입은 시민들이 활동하는 세계시민사회가 학교여야,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출처=그레타 툰베리 인스타그램)
(출처=그레타 툰베리 인스타그램)

아이들 말고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이라는 교과서를 보면, 세상에, 이런 말이 나온다.

묵자는 일찍이, 유가의 인(仁)은 가족애를 시작으로 나라와 세상에까지 이루어 가는 차별적인 인류애 곧 별애(別愛)이며, 그러한 유가의 차별적 사랑은 오히려 세상에 분란만 일으킨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며 겸애(兼愛)를 말하였다. 현대어로 바꾸면 겸애는 평등주의, 박애주의에 해당한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사람’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이 학교다.

그러면서 묵자는 겸애가 펼쳐지는 의로운 세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큰 자는 작은 자를 공격하지 않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많은 자는 적은 자를 해치지 않고, 영민한 자는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으며, 귀한 자는 천한 자에게 오만하지 않고,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에게 교만하지 않으며, 건장한 자는 늙은이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때 묵자의 무차별한 겸애는 부모 자식 사이의 천륜을 무시하고 본성을 위배한다고 하여, 유가의 공격을 심하게 받았다. 겸애하면 서로 이익이라는 묵자의 주장은, 감상적이고 환상적이라고 조롱까지 받았다.

하지만 코로나19 앞에서, 백신 이기주의라는 말까지 생겨나는 지구촌에서, 묵자는 이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야 한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 한다. 그 작업을, 더디지만, 시작할 곳은 이런 ‘사람’을 배우는 교실밖에 없다.

물론 안다. 1%의 가능성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세상, 말도 안 되는 세계’를 준비하고 기획하고 건설할 역량이 아이들에게 있느냐고, 웃을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서로의 생존배낭에 담아 주어야 할 세계 시민성을 마련하는 그 엄청난 일을, 아이들이 할 수 있겠느냐고,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의 시대다. 미래는 기다린다고 저절로 와 주는 것이 아닌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가능성의 흔적이라도 있다면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다.

학교 말고 그곳이 또 어디에 있느냐고,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가 어디 있느냐고, 아이들 말고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툰베리 말고 희망이 어디에 있느냐고, 우리는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계속)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