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곤 한국사교육연구협의회 이사

김성곤 한국사교육연구협의회 이사
김성곤 한국사교육연구협의회 이사

[에듀인뉴스] 대한민국 교육을 공공재(Public Goods)라는 논거로 언제까지 통제할 것인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부러워했던 한국 교육이, 이젠 아이들이 학교에서 기본적인 수업도 못 따라가는 ‘기초학력 저하’라는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중·고등학교 학생들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많이 늘었다. 국·영·수 기초학력 모두 크게 떨어졌는데, 특히 수학은 기초학력 미달률이 10% 넘게 치솟았다. 중학생이 기본적인 사칙연산조차 못 한다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자초한 교육 당국의 반응이 더 황당하다.

전수평가를 표집평가로 바꿔서 그렇다. 토론과 프로젝트 수업 등 혁신적 수업에 아이들이 잘 적응하지 못해서 그렇다.

기가 막히게도 '평가 방식'에 원인을 돌렸다. 하지만 ‘전수평가’였던 2012∼2016년에도 중·고생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증가세였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 가관인 것은 "토론과 프로젝트 같은 ‘혁신적 수업’이 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혁신적 수업’ 방식은 교과서 위주가 아닌 글짓기, 연설하기, 토론하기 등을 이야기하며 이미 지난 10년간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추진하는 일명 공교육이 미는 프로젝트다.

교육부의 설명은 이 같은 혁신적 수업 방식이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지식조차 입력하지 못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토론 위주의 창의적인 수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하부루타 수업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기초학력이 갖춰져야 수준이 있는 토론도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함께하자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번 평가 결과를 두고 “다시 조사하겠다”, “보충학습을 통해 학력저하를 해결해 보겠다”는 궁색한 말만 하고 있다. 글로벌한 인재 육성과 이상적 가치교육이 그저 국민을 유혹하는 포퓰리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 하향 평준화는 나라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는 길이다.

경합성과 배제성을 갖고 있는 교육..."사적 재화"

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적 재화이고(Private Goods) 교육의 수요와 공급은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니 지금은 사실 공교육의 붕괴를 사교육이 대신하고 있다. 공공재를 연구하는 집단들은 어떤 재화가 두 가지 특성, 즉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가지면 공공재로 정의한다. 비경합성이란 어떤 재화를 한 사람이 소비한다고 해서 그 재화의 양이 감소하지 않는 특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경합성이 있는 재화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소비할 수 있다. 비배제성이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소비에서 배제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 재화는 경합성과 배제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노트를 구매하여 사용한다고 하자. 그 사람이 노트를 소비하면 다른 사람이 소비할 노트가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은 노트를 구매하여 사용할 수 없다. 노트는 경합성과 배제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재화로서 세상에 흔한 사적 재화 중 하나다.

이제 앞서 말한 공공재 이론을 교육에 적용에 보자. 교사가 한 명, 학생이 한 명인 경우를 생각해 보면 교사는 학생을 위해 맞춤형 교육을 할 수 있고, 수업 시간 동안 모든 시간과 노력을 한 학생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이제 학생이 두 명으로 늘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두 학생의 교육 수준이 완전히 동일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교사의 교육이 한 학생의 교육 수준에만 근접하면 다른 학생은 그 교육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불만이 생긴다.

만약 두 학생의 교육 수준이 전혀 다르다면 교사 교육의 비경합성 유무 이전에, 교사가 두 학생을 같은 시간에 한 교실에서 가르칠 수 없다. 한 교실의 학생 수가 많아질수록, 학생의 교육 수준이 서로 다를수록 이러한 상황은 가중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의 교육은 교사 한 명이 학생 한 명을 교육하는 것인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국·공립학교의 경우, 공교육이라는 이유로 학생을 배제할 수 없도록 하기에 교육이 마치 비배제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결국 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라 사적 재화다.

운보 김기창의 '서당'
운보 김기창의 '서당'

역사를 참고하더라도 로마 시대의 교육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과목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교사로부터 직접 배우는 방법이었다. 즉 그 시대의 교육은 오늘날의 과외나 가정교사 방식과 매우 유사했다.

조선왕조의 시대에도 ‘성균관’이란 예외를 제하면 주요 교육 제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서당’이었다. 서당 역시 공부하는 학생들의 부모가 대가를 훈장에게 지불하는 방법으로 전적으로 사적 재화이다.

근대국가가 성립하면서 학교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공급자는 민간이었고, 정부나 국가가 학교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은 민간에 의한 학교교육이 보편화한 이후였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도 교육은 사적 재화이다.

공공재 이론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학에 뿌리를 둔 Holcombe는 공공재 이론은 정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고 주장하고 그 점에서 교육, 특히 공교육은 정부의 구성원, 즉 관료의 이익을 위하게 된다는 것이다. Holcombe는 “공공재 이론은 국가가 지배하는 고등교육 체제의 산물이고 정부 행위가 정당하다는 인식을 강화”했다고 말한다.

결국 교육의 공공성, 더 구체적으로 교육이 공공재라는 주장은 그 근거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은 전적으로 사적 재화이고 사적 영역에 속한다. 사적 재화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자율적으로 생산하고 선택하는 권리를 가진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근대 국가 이전에 교육은 사적 재화였고, 현재도 국·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가 국민이 원하는 품질의 교육을 제공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사교육을 옹호하고, 공교육을 무작정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제도권 교육 내에서 아이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적 능력을 쌓게 해 주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어떠한 도전이든 해 보게 만들어줄 의무가 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아이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 것인지, 교육부가 멀리 바라보고 ‘답’을 내놔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