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에듀인뉴스] 문재인 정부가 어느새 임기 2년을 넘어섰다. 임기 5년차가 사실상 차기 선거기간임을 감안하면 반환점을 돈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평가는? 경제와 외교분야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어 묻히는 감이 있지만, 공교육 분야 역시 지난 2년간 처참한 성적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미래보다는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과거에 더 관심이 많은 정부라 그 본질상 미래, 그것도 한 세대 정도 먼 미래를 바라봐야 하는 교육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30년 뒤에 현 집권당이 남아있을지 조차 장담할 수 없으니, 당장 내년의 지방선거, 또 당장 내년의 총선 이러면서 그때 그때 국민들이 관심있을 거라 믿는 이슈에만 매달렸을 것이다. 당은 사라져도 이 어린이, 청소년이 살아가야 할 나라는 계속 존재한다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은 그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그때 그때 표계산에 매달리는 짧은 소견과 ‘적폐청산’이라는 과거지향적 시야가 만나면 결국 공교육 내의 적폐몰이로 내달릴 수 밖에 없다. 원래 공교육 자체가 성공해 봐야 티도 나지 않고, 실패만 두드러지는 영역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믿고,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성공한 사람들은 소수다. 그러니 언제나 사회 다수는 자신의 실패를 전가할 대상을 찾기 마련이며, 교육이야 말로 가장 만만한 대상인 것이다.

참여정부때도 역시 공교육 적폐몰이가 있었다. 그때는 “경쟁이 없어 무능한 공교육 vs 경쟁하기 때문에 유능한 사교육” 프레임을 끌고 들어왔다. 이 프레임을 고스란히 계승한 이명박은 결국 무분별한 교육시장화, 경쟁강화 정책으로 공교육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때는 효율의 잣대를 들이대더니 이번에는 정의의 잣대를 들이댄다. 바로 정규직 vs 비정규직 프레임. 학교의 정규직은 대부분 교사일테니, 결국 갑질하는 교사와 열심히 일하는 비정규직 구도가 그려진 것이다. 이로써 교사는 적폐집단이 되었다.

이른바 진보 언론이라 불리는 매체들 역시 정규직 교사의 갑질하는 적폐몰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대자동차 노조 등의 정규직 갑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던 이들은 정규직 교사 갑질몰이에는 심지어 거의 소설에 가까운 기사(공교롭게 그 기사는 기자가 아닌 소설가가 외부 필진 자격으로)를 썼다. 불법 잠입취재 및 거두절미 인터뷰까지 써가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른바 진보진영의 교사패싱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참았다.

하지만 2017년 어느 여름의 모욕 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도 잊을 수도 없었다. 그 날 많은 교사들이 한겨레신문을 보고 분노했다. 보수적인 교사들이라서가 아니다. 교사라면 누구나 분노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겨레신문 사옥 앞에서 신문 소각 퍼포먼스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기사가 아니라 단 한컷의 만평이었다.

2017년 6월30일 한겨레 그림판 만평. (출처=한겨레)

이 만평의 주제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한 아이가 하루를 보내는 동안 담임교사 외에는 온통 비정규직 노동자들만 만나는 현실을 꼬집는 것이다.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주제다.

학교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며, 적어도 아이들과 일상적으로 만나는 자리 만큼은 어느 정도 안정성이 보장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정규직일 때와 정규직일 때는 선발기준과 검증절차가 지금보다 더 까다로워져야 하겠지만, 그건 별도로 논하기로 하고 넘어가자. 

그렇다면 교사들이 왜 분노했을까? 이 아이가 거쳐가는 여러 어른들 중 유일한 정규직인 담임교사를 표현한 방식 때문이다.

담임교사만 말이 없다. 담임교사만 표정이 없다. 담임교사만 아이에게 다정한 눈짓 하나 보내지 않는다. 엄마는 안경 안에 눈이 있는데 담임교사는 차가운 안경알만 번득이고 있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절대 다른 뜻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자세히 보면 담임교사도 미소짓는 따뜻한 모습이라며 항변했지만, 워낙 이전, 이후로 물의를 많이 일으킨 작가라 그 말을 선뜻 믿기 어려웠다.

그 만평에서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비정규직들이며, 냉정하고 무관심한 사람은 오직 하나, 정규직 기득권자인 담임교사라는 뉘앙스가 읽혔다. 적어도 교사들에게는 그렇게 읽혔다.

이 무렵 한창 학교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이슈가 되었고, 이게 엉뚱하게 기간제교사, 스포츠강사, 영어전문강사를 정규교사로 전환하네 마네 하면서 논란이 되던 시기라 더더욱 그랬다. 심지어 팩트 오류도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교과전담 교사는 비정규직 보다는 오히려 정규직교사 중에서도 고참급이 맡는 경우가 많고, 방과후학교나 학원 종사자를 교사라 부를 수 없다. 하지만 저 차갑고 냉정하고 무관심한 담임교사 이미지가 너무 충격적이라 그 정도 팩트 오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만평은 우리 사회에 은연중에 퍼져 있는 ‘아줌마 혐오’를 동원했다. 이 여덟명의 어른들 중 오직 차갑고 무관심한 담임교사만 뚱뚱하고 안경쓴 ‘아줌마’인 것이다. 이른바 진보 언론에서 세상에 잘못 퍼진 혐오 이미지와 편견을 극복하기는 커녕 도리어 이용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상한 편견이 있다. 무슨 영문인지 사람들은 무능하고 무관심한 교사의 이미지를 떠올리라고 하면 ‘뚱뚱한 아줌마 선생’을 그린다. 무능하고 무관심한 교사의 이미지로 ‘건장한 아저씨 선생’을 그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자는 남자보다 무지하고, 특히 나이 많은 여자는 더 무지하다는 이중 여혐이 여성이 더 많은 직종인 교직사회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이는 한때 밈으로까지 나돌았던 ‘김여사 놀이’와 비슷하다. ‘김여사 놀이’의 특징은 황당한 주행을 하거나 주차를 하는 자동차만 나올뿐, 운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 김여사가 타고 있다”라고 전제하며 각종 조롱이 쏟아진다.

그 황당하고 무례한 운전자가 남자일 가능성, 양복입은 아저씨일 가능성은 아예 배제된다. 이때 만약 그 ‘김여사’의 모습을 그려보라 한다면 십중팔구 저 만평의 정규직 담임교사 같은 모양, 안경쓰고 뚱뚱한 중년 여성을 그릴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 반대다. 대형 교통사고의 주범은 김여사가 아니다. 오히려 아저씨들이다. 마찬가지로 냉담하고 무관심한 교사 역시 저 김여사 느낌의 아줌마일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안경쓰고 뚱뚱한 아줌마 교사들이 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공교육을 이나마 끌고가고 있는 주축세력이라고 보는게 현실에 가깝다. 이들이야 말로 20평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박한 기쁨 외에 한눈 팔지 않고 바깥에서 뭐라 하든 최선을 다해온 소중한 교육 자원이다.

그런데 이들을 패싱하고 현장과 동떨어진 탁상공론만 일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적폐로까지 몰았으니, 이건 공교육의 기둥뿌리를 뽑은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2년간 급격하게 늘어난 베테랑 교사들의 명예퇴직이 과연 학생지도 어려움, 학부모 갑질 때문만일까? 애초에 학생지도를 어렵게 만들고, 학부모 갑질이 기승을 부리게 만든 사회적 분위기에 정부와 진보진영은 과연 아무 책임이 없을까?

이 정부, 그리고 이른바 진보진영은 교육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 전에 우선 안경쓰고 뚱뚱한 아줌마 교사로 상징되는 평범하지만 성실한 베테랑 여성 교사들에게 준 상처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교육정책을 펼치든 우선 그들 앞에 겸허한 자세로 진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20평 교실에서의 소박한 기쁨보다 헛된 공명심에 불타는 이런 저런 교육 명망가들(대부분 양복입은 아저씨다)의 허명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들의 마이크를 빼앗아 바로 이 아줌마들에게 쥐어주어야 할 것이다.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