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을 앞두고...1년 이라는 제한된 시간, 여행과 일상의 경계 같은 시간 끝에서

[에듀인뉴스] 동반휴직으로 미국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학교생활과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이자, 커다란 쉼표 같은 시간이다. 숨 가쁘게 달리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쏟아지듯 부여되는 일들에 묻혀 살다보면 무엇 때문에 애 쓰고 있는지도 잊는다. 그래서 가끔은 한 발 떨어져 보는 것이 필요하다. 거리를 두고 보면 놓쳤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다른 각도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국에서의 시간이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교사는 가장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직업군이다. 학교로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이 더 선명하게 보일까? 한국 공교육 현장을 벗어나 타지에 서면,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직접 삶으로 미국 문화를 경험하며 ‘차이’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그 생각을 확장 시키는 과정을 공유하고 싶다.

도시의 슬로건이 Keep Portland Weird, 직역하면 ‘포틀랜드를 이상하게 유지하라’ 인 포틀랜드. 그만큼 서로 다른 독특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도시이다. 다름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사진=이다정 교사)
도시의 슬로건이 Keep Portland Weird, 직역하면 ‘포틀랜드를 이상하게 유지하라’ 인 포틀랜드. 그만큼 서로 다른 독특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도시이다. 다름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사진=이다정 교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이라는 시간. 떠나올 때만 해도 전 세계가 바이러스로 멈춘 것 같은 시간이 될 줄 몰랐는데, 시간은 올해도 어김없이 궤적을 그리며 흘러간다.

교사는 1년이란 단위로 아이들을 만나고 끝맺음을 하며 살아가기에 1년이란 시간이 다른 직종의 사람들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끝이 보이는 2월 즈음이 되면 말썽 피우던 녀석들도 바라보며 피식 웃게 되고, 종업식 후 왁자지껄 하던 교실에 적막이 흐르고 스며든 햇빛에 부유하는 먼지만 남을 때는 텅 빔에서 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마음을 추스렸던 기억이 난다.

한 해 한 해 그렇게 채워 가다보면 견고한 뭔가가 생길 줄 알았는데 매 번 다시 허우적대며 일 년이란 시간을 보내곤 했다.

2020년, 미국에서 보낸 긴 여행 같은 시간의 끝이 보인다.

학교 밖, 그것도 나라 밖 낯선 환경 속에서, 팬데믹이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기쁠 수만은 없었던 시간. 두려움과 무력감에 힘들기도 했지만, 기존에 경험해 보지 못한 여행, 아니 ‘여행 같은 일상’을 보낸 시간이었다.

기부한 물건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GOODWILL, 재고 상품을 싼값에 파는 ROSS 같은 마켓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채운 집. 산 것 만큼 주변에서 나누어 주신 것들이 더 많았다. (오른쪽) 일 년간 그림으로 자신의 경험을 남긴 아들.(사진=이다정 교사)
기부한 물건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GOODWILL, 재고 상품을 싼값에 파는 ROSS 같은 마켓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채운 집. 산 것 만큼 주변에서 나누어 주신 것들이 더 많았다. (오른쪽) 일 년간 그림으로 자신의 경험을 남긴 아들.(사진=이다정 교사)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 기준들이 무너져버린 시간 속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올 해. 모든 사람들이 느낀 것을 나는 조금 더 먼 곳에서 더 많이 느낀 것 같다.

제한된 시간에서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 소중하게 느껴졌고, 이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도 귀하게 여겨졌다.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들이 신기해서 호기심을 품고 바라보게 되듯 올 한 해가 내게 그랬다.

여행과 일상 그 경계 즈음 되는 시간이라 복합적인 감정이 생기기도 했다. 떠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애틋하면서도 비슷한 루틴으로 흘러가는 하루하루 일상은 조금 지루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떠날 때가 가까워져 모든 것이 아쉽고 한 번이라도 더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집 앞 나뭇가지 끝 잎 새, 비에 젖은 낙엽냄새, 습한 공기 같은 소소한 것까지.

‘제한된 시간 속에 머무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며 직진본능으로 살아온 시간, ‘채움’에 대한 강박이 컸던 시간과 달리 끝이 정해진 시간 속에서 살다보니 세상이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렇게 바뀐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국으로 빈 몸으로 돌아가야 하다 보니 소유에 대해서도 내려놓게 되고 자연스럽게 빡빡하게 채웠던 삶의 밀도도 달라졌다.

맨 몸으로 온 우리 가족은 주변의 나눔과 중고로 살림살이를 채웠고, 좋은 것 보다는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얼마 안 되는 비용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 지는 놀라운 중고세상을 경험하고,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온정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얼마 전 6살 아들이 A4용지를 한국에 가져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올 초 이곳에 와서 손에 힘이 생겨 연필을 쥐게 된 녀석은 A4용지에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한 장 한 장 쌓인 그림들이 소중했나보다.

큰 장남감도, 타던 자전거도 가져 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그 흔한 A4용지가 아이에겐 가장 가져가고 싶은 것이었다.

이곳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담은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를 보며 정작 소중한 것은 보지 못한 채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며 채우기 위해 살아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가장 남기고 싶은 것,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젠 온전한 비움의 시간이다. 일 년 동안 집에 채워진 물건들에게 다른 주인을 찾아주고 있다.

있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비워지는 공간들을 바라보다 보니 학년 말 텅 빈 교실이 생각난다.

잠시 텅 빈 교실을 마주해야 새로운 아이들을 마주할 힘이 생기듯, 삶은 채움과 비움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멀리 와서야 새삼 깨닫는다.

철학자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는 그가 암 투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날 것을 기록한 책이다. 얼마 남지 않는 시간. 그 제한된 시간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며 읽다보면 마음이 아리면서도 따뜻해진다.

“생 안에 텅 빔 같은 건 없다, 존재는 늘 충만할 뿐.”

이 글귀는 올 한 해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이토록 와 닿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는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고, 세상은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우리 삶 역시 유한한데, 우리는 자주 잊는다. 내가 사랑할 대상이 얼마나 많으며, 내게 주어진 것이 많은지를.

포틀랜드의 여름, 가을, 겨울. 코로나로 첫 봉쇄령이 내려진 봄은 외출을 거의 못해 바깥 풍경 사진이 없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계절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사진=이다정 교사)
포틀랜드의 여름, 가을, 겨울. 코로나로 첫 봉쇄령이 내려진 봄은 외출을 거의 못해 바깥 풍경 사진이 없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계절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사진=이다정 교사)

출발점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비움’을 경험한 시간.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 제한된 시간이기에 더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 잠시 일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었던 시간. 제한된 시간의 끝을 맺고 이제 또 다른 펼쳐진 시간 속으로 돌아간다.

여행 같은 일상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되는 일상은 낯섦 앞에 보다 유연한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자연친화적인 북서부의 작은 도시, 포트랜드. 일 년간 이 곳에서 무사히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더 감사한 것은 올 때는 셋, 돌아갈 때는 네 가족이 되어 돌아간다는 것.(사진=이다정 교사)
자연친화적인 북서부의 작은 도시, 포트랜드. 일 년간 이 곳에서 무사히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더 감사한 것은 올 때는 셋, 돌아갈 때는 네 가족이 되어 돌아간다는 것.(사진=이다정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