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11) 조선의 흑인과 서양인들

2019년 다문화 학생 수는 12만2212명. 학생 수가 줄고 있는 반면 다문화 학생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다문화 교육의 정의 및 내용에 대한 구체적 합의와 법령체계는 미흡한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가 공존할 때 창의적 문명의 꽃이 피어나고, 문화 인류학과 다문화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갖춘 사람이 미래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BTS) 노래에 민속춤이 어우러지듯 다문화는 함께 공존하고, 어우러짐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밑바탕이 된다. <에듀인뉴스>는 우리가 지나쳤던 다양한 문화를 다문화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의 글을 통해 폭넓은 다문화 인식은 물론 다문화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콘텐츠도 제공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최초의 서양 귀화인 박연. (사진=mbc 드라마 탐나는도다)

[에듀인뉴스]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 마지막 편은 조선에 들어온 흑인들과 서양인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에 대해서 하멜표류기 등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벨테브레이(조선명 박연)였고, 뒤이어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 들어왔다. 그리고 이름은 확실치 않지만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들어와 수군 전투에 임하던 해귀라는 포로투칼 흑인용병들이 있었다.

흑인용병 해귀를 다룬 웹 드라마.(사진=mbc에브리원)
'천조장사전별도'에는 명나라 군사들의 행렬 뒤에 몸집이 크고 얼굴빛이 검은 네명의 해귀가 그려져 있다.

해귀...포르투칼에서 온 임진왜란 흑인 용병 

먼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수군 전투에 임했던 해귀라고 하는 4명의 흑인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는 해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호광의 극남에 있는 파랑국 사람이 있습니다. 바다 셋을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리가 넘습니다. 그 사람들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가지 재주를 지녔습니다."

이들의 다른 이름은 해귀이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거리고 검은 양의 털처럼 꼬부라져 있다. 머리가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런 비단을 반도의 형상처럼 서려서 머리위에 올려놓았다. 바다 밑으로 잠수해 적선을 공격할 수가 있고, 수 일 동안 물속에 있으면서 물속에 사는 것들을 잡아먹을 수 있다. 중원 사람들도 보기가 쉽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는 먼리서 온 흑인용병이 신기해서인지 자주 만났던 것으로 나온다. 선조실록을 보자. 

"팽 유격이 회사차 오니 왕께서 맞아들인 뒤 자리에 앉았다. 해귀 3명이 뜰 아래에서 배알하자 왕께서 칼솜씨를 시연해보게 한 뒤 은자 한냥을 내려주었다. 팽 유격과의 다례자리를 파한 뒤 해귀들이 읍하고 밖으로 나갔다."

또한 해귀들을 겁내는 왜군에게 부풀려 전하는 심리전 이야기도 등장한다. 전라도 관찰사 황신의 치계이다. 

"적진을 왕래하는 박여경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습니다. 왜적들이 명군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기에 명군의 수군과 육군을 합해 40만명이고 해귀와 달자(타타르, 원나라병사)도 많이 있다고 엄청나게 부풀려서 말했더니, 왜적들의 얼굴색이 변하면서 짐과 잡물을 모두 배에 실었습니다. 소서행장은 사천으로 향했다가 본진으로 돌아온 뒤 군사들에게 성을 계속 증축하고 허물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 외에 의병장 경경운의 '고대일록',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유성룡의 '서애집'에서도 신출귀몰한 해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 책들에는 해귀가 "일반사람보다 몸집이 매우 크며 외모가 특이했다"는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다.

또 귀환하는 명군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에는 명나라 군사들의 행렬 뒤에 몸집이 크고 얼굴빛이 검은 네명의 해귀가 그려져 있다. 이는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해귀가 4명 있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박연(본명 벨테브레이)...원산박씨의 선조로 알려졌으나 분단 후 후손 못찾아

박연 동상 

박연의 네덜란드 본명은 얀 아너스 벨테브레이다. 그는 제주도에 표류한 뒤 한양으로 압송된 후, 본국으로 송환하려했지만, 명청 교체기로 중국 정세로 인해 소환되지 못하고, 일본쪽으로 해서 송환하려 했으나 일본에서 그가 크리스찬이라서 거부하는 바람에 조선에 머물게 되었다.

그 후 조선에서 부인도 맞이하고 1남 1녀를 낳은 뒤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 벨테브레이 이전에도 마링예이루(마리이)라는 서양인이 제주도에 표착된 적이 있지만, 곧바로 명나라로 돌려보내졌다. 

그는 암스테르담 북쪽에 있는 더레이프라는 시골마을 출신으로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로인해 그는 사략선(동인도회사에 소속된 해적선) 선원이 되어 중국과 동남아 해안을 떠돌았다. 즉, 하멜이 동인도회사의 정직원이었다면 벨테브레이는 동인도회사의 하청으로 운영되는 사략선(해적선)의 초급 간부급(직장) 되는 선원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고국에 탄탄한 기반이 있는 하멜은 죽기살기로 탈출을 했지만, 벨테브레이는 그냥 조선에 머물러 산 것 같다. 

조선에 머물게 된 뒤, 그는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조선 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는 조선 이름을 박연으로 짓고 1남 1녀를 두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원산을 본으로 하는 원산박씨가 그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분단된 후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 쪽에는 그의 후손이 존재하고 있고, 1990년도에 한국의 후손을 찾기위해 들어왔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제주도에 표착된 것은 그의 샤략선(해적선)인 아우베르케르크호가 중국 상선을 납치한 후 자카르타의 기지로 가면서 벨테브레이는 부하들과 중국 상선에 올라탔다가 풍랑을 만나 모선과 떨어지게 되어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 후 모선조차 선상 반란으로 네덜란드 선원 전체가 몰살당했다고 한다. 그 후 같이 표착한 동료 2명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된 후, 송환되지 못하고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일하다가 병자호란에 참전해 동료 2명은 전사하고 벨테브레이만 남게 되었다. 

그 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자, 이들과의 통역을 위해 나서면서 하멜을 만나게 되었다. 하멜을 만난 후 26년이나 조선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언어가 어눌했으나, 이내 말이 잘 통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하멜표류기에는 벨테브레이를 만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무적으로만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하멜 일행을 만난 후 벨테브레이는 향수병으로 옷소매 적삼이 다 젖도록 통곡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여 세가 되었을 때다. 

그는 훈련도감에 근무하면서 홍이포 제작이나 조총 제작 등의 기술을 전수해주고 외인부대 지휘관을 역임하며 조선군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조정에서는 그에게 종5품에 준하는 벼슬을 주고 부인을 맞아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으로 나타난다. 하멜 일행이 겪었던 포로생활과 굶주림, 노역 생활에 비하면, 벨테브레이는 조선으로 귀화하면서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사진=기념관 블로그)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사진=기념관 블로그)

하멜...하멜표류기로 알려진 '난선 제주도 이야기'와 '조선국기' 저술

우리에게 하멜표류기로 널리 알려진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큄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호르큄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였으며, 라인강 운하와 연결되어 곡물 수송의 중심으로 선박운항이 잦았다. 또한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지의 국가들과 해상무역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하멜도 동인도회사에 취업하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넘어갔다. 

자카르타로 넘어간 하멜은 동인도회사 본사에서 서기로 일했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 용머리해안에 표착하게 된다. 그는 제주도에 표착한 후 먼저 조선에 와 있던 벨테브레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조선에서 풀려날 길이 없다고 판단한 후 1차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탈출은 실패로 끝나고, 그로 인해 처형될 위기를 넘기고 한양으로 압송되게 된다. 

한양에 압송된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새로운 군사기술을 전수하고 무기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몰래 청나라 사신 일행을 만나 자신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다시 발각되어 전라병영이 있는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강진에서 전라병영을 축조하는 노역에 종사하던 중 식량문제 등으로 구걸을 하다가 강진, 여수, 등지로 분산 배치되었다. 그 후 하멜을 포함한 7인은 잔치를 빙자하여 조선을 탈출하는데 성공, 나가사끼에 도착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진=ebs클립뱅크)
(사진=ebs클립뱅크)

그 외 29명 중에서 나머지는 혹독한 과정속에서 죽게 되고, 나머지 7인은 다시 일본으로 넘겨져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간 하멜은 동인도회사로부터 위로금을 타내기 위해 자신의 표류기를 '보고서'로 쓰게 되었다.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책의 원래 이름은 '난선 제주도 이야기'였고, 부록으로 '조선국기'라는 이름이었다. 이로서 조선을 처음 서양에 소개한 '하멜표류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멜표류기에는 당시 조선의 생활상과 하멜 일행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 어떻게 대했는가가 잘 나타나있다. 

이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서는 조선과의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에 달하는 '코레아 호'를 제작하고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하멜 일행이 전한 조선과 일본 관료들의 처신을 보면, 왜 조선이 몰락하게 되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즉, 일본의 관료들은 하멜 일행으로부터 각종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조선인들은 그저 자신들을 구경꾼 취급했을 뿐 아니라, 노역에 종사시키고 군림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nbsp;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 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