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중국, 가까운 듯하면서 이질감이 드는 곳이다. G2로 미국과 견주고 있는 중국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을 비웃는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 지리상으로 가까워 문화적으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중국. <에듀인뉴스>는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를 통해 중국의 도시에 살아가면서 느낀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현지에서 중국을 접하고 알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인해 중국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과거에 대한 이해와 미래를 예측해보는 작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알다가도 모를 중국!

랴오닝성의 성도 선양의 선양역 앞 초소에 무장을 한 경찰들이 있다.(사진=김현진 교사)

[에듀인뉴스] 선양역 앞에는 무장을 한 경찰들과 장갑차들이 있다. 조금은 살벌하지만 중국에 와서는 워낙 자주 봤기 때문에 조심하면서 숙소로 향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개방과 개혁을 추구하기 때문에 중국의 대부분 도시 곳곳을 보면 한국의 대도시보다 번화한 곳들이 많다. 

중국 대도시의 기본 인구는 대략 1000만명이 넘는다. 충칭 같은 곳은 인구가 3000만명이 넘는다. 괜히 대륙이 아니다. 역에서 길을 건너 반대편을 보니 양옆 건물들이 대부분 대형 백화점이다. 아울렛, 월마트 및 까르프 등 대형마트, 커다랗게 보이는 삼성로고와 한국 배우들이 입고 있는 아웃도어 대형 광고판, 그리고 2~3개 정도의 대형 백화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먼 곳까지 계속해서 줄지어 있는 대형 백화점들... 

그 규모를 보면 괜히 대륙이 아니다. 조금만 더 걸어가니 다이소의 중국판 브랜드인 대형 미니소가 보인다. 길 입구에 태원가라고 한자로 크게 적혀 있어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 

중국은 남북 방향의 길에는 이름 뒤에 ‘지애 街’를 붙이고 동서 방향의 길에는 ‘루 路’를 붙인다. 

청나라 초기 궁전 선양 고궁입구. 베이징 자금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사진=김현진 교사)

숙소가 번화가 옆에 바로 있어 체크인을 하고 들어갔더니 아파트형 호텔인데 우리 가족 3명이 사용하기엔 굉장히 큰 편이다.

스마트폰으로 미리 예약을 해서 모든 호텔비가 지급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미니바 사용 후 요금 지불 등을 위해 신용카드로 체크해놓는 것처럼 야진이라 해서 보증금을 냈다가 체크아웃 할 때 찾아가야 한다. 중국의 다른 호텔에서는 야진을 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시 나온 태원가는 선양역 근처에 위치한 보행가로, 우리나라의 명동 정도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각종 생활용품과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노점도 있고, 쇼핑몰인 완다 광장(万达广场)도 있다. 중국에는 광장(广场)은 우리가 알고 있는 커다란 광장을 뜻하기도 하지만 대형 상가도 광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국의 도시 곳곳에는 광장들이 꽤 많다. 

특히 부동산 회사로 유명한 완다는 중국 전역에 300개 가까이 완다 광장을 세워 놓았다. 내가 지내고 있는 다롄도 완다 광장이 몇 개 있다. 태원가는 바로 아래인 지하상가 신천지(新天地,신톈디)는 선양의 젊은층인 20~30대가 주요 고객이다. 

4월초 아직은 날씨가 춥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하로도 많이 다닌다. 신천지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패션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도시 대부분이 택시비 기본요금이 10위안이지만 이곳 선양은 택시비가 8위안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정인 고궁을 찾아갔다.

택시를 타고 청나라 초기 수도였던 선양의 궁궐인 고궁으로 향하였다. 20~30분쯤 타고 가다가 바이두 지도를 보니 얼추 가까이 온 것 같다. 바로 앞으로 보이는 페루 모양의 건축물이 보인다. 여기인가 물어보니 더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고궁 입구 앞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입장권을 위챗으로 구입하여 입구로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위챗 메신저를 통해 은행계좌와 연동하여 지불수단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 

청나라 초기의 궁전인 선양 고궁(沈阳故宫, 선양 구궁)은 베이징의 자금성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선양 최고의 관광명소로 꼽힌다. 바로 인근에는 시안 사변을 일으켰던 장쉐량(张学良)의 저택인 장씨수부(张氏帅府)가 있다. 

1636년 청 태종 홍타이지는 한위(汗位)를 버리고 황제로서의 즉위식을 고궁에 서 행했다. 청이 산하이관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에 청의 수도는 베이징으로 옮겨갔으며 선양은 황제가 동북 지방을 순회할 때 머무르는 곳이 되었다. 규모는 자금성의 1/13이며 2004년 UNESCO 세계유산인 베이징 고궁에 추가하여 명청황가궁전으로 확대 등재되었다. 

선양 고궁의 동로 대정전. 만주족 전통의 느낌이 강한 곳이다. 청나라 건국 행사가 열린 곳.(사진=김현진 교사)

고궁(古宮)은 외관상으로는 북경 자금성의 축소판으로 보이지만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규모이며 만주식 건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축은 누르하치 시절에 시작하였으나 1636년 그의 아들 홍타이지 때에 완성되었다. 

선양 고궁은 크게 서로, 중로, 동로 세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동로는 누르하치 시대부터 건립된 곳이고, 중로는 청 태종, 그리고 동로는 베이징 천도 이후 지어진 곳이다. 동로에서는 파격적인 만주식 건축이 눈에 띄며, 중로에서는 만주식과 중국식의 혼합, 그리고 서로에서는 만주식보다는 중국식이 강한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대청문을 들어가면 중로의 숭정전이 바로 눈에 띈다. 우측은 누르하치, 중앙부분은 홍타이지, 좌측은 강희제의 그림이 순차적으로 보인다. 크기는 베이징의 고궁보다는 훨씬 작고 아담하지만 건물의 장식들은 만주족의 느낌이 아주 강해 자금성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선양 고궁 서로의 문소각 건물. 청나라 황실 도서관이었다.(사진=김현진 교사)

황제의 집무 공간 현판에는 자금성에 적혀 있는 正大光明과 마찬가지로 적혀 있으며 한자와 만주어가 병기되어 있다.

선양고궁 한 켠에는 당대의 문방사우들과 황제의 글씨를 전시해 두고 있다.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청의 황제들이 계속 이곳을 찾았기 때문에 선양에도 남아있는 황실 유물이 많다.

청의 황제들은 만주어와 중국어(만다린), 유학, 기마술, 무술에 모두 뛰어났어야 했다. 실제로 청의 초대 두 황제인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직접 나서서 군대를 지휘했고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사망했다. 

이들에게는 만다린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유교 철학을 통달하는 것도 중요했다.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다수 민족인 한족을 통치하는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모든 면에서 한족보다 뛰어나야 했기 때문이고, 한족이 인정할 수 있는 교양과 식견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민족으로 다수의 한족을 다스려야 하는 점들이 우월적인 면도 있겠지만 나름대로의 불안함과 스트레스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은 명을 따르고 청을 오랑캐라고 하여 배척하다가 50만명의 포로가 잡혀가고 조선의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던 해인 1636년 4월에 청 태종 홍타이지는 대정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다른 외국 사신들은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며 무릎을 꿇었다는데 조선 사신들은 황제란 명의 황제밖에 있을 수 없다 하여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한다. 

청의 신하들은 조선 사신들의 행동을 무례하다 하여 목을 베자 하였으나, 산하이관을 넘어 명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조선이 공격할 것을 두려워한 태종은 불필요한 충돌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사신을 달래서 칙서를 주어 조선으로 보냈는데, 명에 대한 사대주의로 가득 찼던 조선 사신은 여관에 잃어버리고 왔다는 핑계로 다른 종이에 옮겨 써서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 해 조선은 청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청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던 인조 임금, 그리고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대군, 봉림대군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불안해 하던 인조 임금 그리고 그 뒷이야기들... 

역사는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그때의 판단이 바뀌었다면 또 어떤 일들로 역사가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 역사적 장소였던 청나라 수도 고궁에서 우리의 역사를 상상해본다.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