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고 탄생과 폐지...모두 당사자 '학생'은 배제
어른들 손에 좌지우지 되는 현실 안타깝고 분해
좋은 '친구, 선생님, 분위기' 3박자 갖춘 학교 지켜야

[에듀인뉴스] 안녕하세요. 저는 2004년 상산고등학교에 입학한 자사고 2기 졸업생입니다.

지난 6월, 모교의 자사고 재지정 취소라는 뉴스에 깜짝 놀랐지만 믿고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김승환 교육감님과 전북교육청의 자의적인 기준과 행동은 변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급기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문제의 본질에서 멀어져 이념 간 대립과 정치적 프레임의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은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나라 교육 정책은 매년 바뀌어 왔습니다.

자사고라는 씨앗도 뿌려진 지 이제 겨우 10여 년. 2003년 상산고등학교에 입학했던 자사고 1기 졸업생들은 올해 33살이 되었습니다. 상산의 동산에서 뛰어놀던 어린 학생들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셈입니다.

30대 초반의 저희는 아직 사회초년생이라 불립니다.

저희가 좀 더 나이를 먹고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라면 상산고등학교가 단지 입시사관학교가 아님을, 홍성대 이사장님과 선생님, 교직원 분들의 사랑과 피땀으로 일구어진 이 학교의 참교육 하에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랐음을, 저희의 삶과 인생 궤적으로 증명하며 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을 텐데 그러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 짧다 느껴집니다.

자사고의 탄생과 폐지, 모두 당사자인 저희와 학생들은 배제된 채 여전히 어른들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현실에 안타깝고 분한 마음이 들 뿐입니다. 더군다나 과거에 자사고를 출범시켰던 이유와, 오늘날 자사고를 없애려는 이유의 중심에, 공교육 황폐화라는 동일한 문제가 있으니 아이러니함 마저 느껴집니다.

제가 나온 모교가 상산고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사고 폐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크게 보았을 때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자사고가 문제가 된다면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거쳐 올바른 기준과 방향성을 갖고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만 논란이 많은 현 상황에서 상산고등학교가 본보기 혹은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그래서도 안 될 일이라 생각할 뿐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그저 모교를 사랑하는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모든 문제를 배제하고, 제가 다녔던 상산고등학교에 대해서만 몇 가지 얘기해보려 합니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첫 번째로 상산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이 입시 위주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방학 때의 과제가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느 날의 양서 읽기 시간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고 자유시장 경제에 대해 배우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영어책 읽기 시간에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영어로 읽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픈 책들을 꾸역꾸역 소화하며 수능에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대체 왜 해야 하냐며 한숨을 쉬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이런 책들을 접하지 않았다면 평생 어디서도 배울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어느 토요일 특강 시간에는 피타고라스와 관련된 대학 수학 수업을 듣고 정리를 해야 했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피피티를 보고 거의 그림 그리듯이 베껴냈던 기억도 납니다.

명사 특강 때는 ‘연어’를 쓰신 안도현 작가님이 오신 적이 있었는데 양서 읽기 시간에 연어라는 책을 읽고 난 후였던지라 그 감동이 더 컸었습니다. 영어 회화 시간에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영화를 연극으로 꾸며 무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여학생들이 미니 농구와 비슷한 넷볼에 빠져서 한동안 체육시간마다 선생님을 졸라 넷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체육시간 이외에도 태권도 시간이 따로 있어서 매년 승단심사를 치르고 상산고등학교 졸업생들은 최소 1단 이상의 유단자가 됩니다.

점심시간에는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언제나 동아리 친구들과 제일 늦게 밥을 먹곤 했지만 덕분에 식당의 모든 메뉴를 맛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축제 때 반 친구들끼리 테마를 정해서 음식을 만들어서 팔아 보기도 하고, 게임 아이템을 개발해서 진행하였던 것도 큰 추억입니다.

단순히 기억나는 것들 몇 가지 나열한 것만을 봐도 입시를 위한 공부와는 큰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면 시험기간 이외에는 그저 열심히 놀았던 기억이 훨씬 많습니다. 공부를 강제로 시키는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부모님들이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교에 간 것 아니냐며 걱정하실 정도였지요.

다만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놀 때도, 공부할 때도 정말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즐거웠고, 때로는 힘들기도 했지만 접해본 것과 접해보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이제는 압니다.

상산고등학교의 교과목 이외의 많은 수업과 활동들은 다양한 세상에 나를 노출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키워주며,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훌륭한 밑거름이 되는 일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상산고등학교의 사교육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학교에서는 야간자율학습시간에 학원에 가는 것을 허락해줍니다. 저도 학원에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학원을 한두 달 다녀본 친구들은 학원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게 됩니다.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 것보다 자율학습시간에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 곁에서 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야간자율학습시간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집에 가지 않으면 학교에 남아 쉬면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세 번째로 상산고등학교 학생들이 의대에 많이 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상산고 졸업생들이 의대를 많이 가는 것은 그만큼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모였다는 방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한 시대의 우수한 아이들이 그 시대의 최고의 가치를 좇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기초 과학자를 최고로 꼽았다면 기초 과학에, 철학자를 최고로 꼽았다면 철학과에 갔을 아이들입니다.

학생들이 어찌하여 다양한 자신만의 꿈을 갖고 그 꿈을 향해 매진하지 못하고, 그 시대의 최고의 가치만 따라가려 하느냐 물으신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네 번째로 상산고등학교와 지역인재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상산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전주라는 낯선 지역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전주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갖는 아련함과 애틋한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짐을 어른들은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학생들이 졸업 후 전북에 남지 않고 전국 각지로 흩어진다고 하더라도 전북 지역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남들보다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은 당연할 것이고, 그 관심은 전북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평생을 그 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만을 위해 힘써야만 지역인재입니까. 상산고에 오지 않았다면 전북이라는 지역에는 평생 와 볼 일도 없고, 생각해볼 일도 없었을 학생들의 마음 한켠에 전주라는 곳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다섯 번째는 상산고등학교와 수월성 교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상산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은 가장 건전한 방식으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매우 건전한 좌절과 실패를 경험합니다. 이 좌절과 실패는 당시에는 너무나 쓰라리지만 상산고에 입학하기 전까지 승승장구하기만 했던 아이들에게 실패하는 법, 좌절하는 법,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산고등학교는 이를 비뚤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적절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터전입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남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 격려하면서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다른 친구가 잘하는 것이 다름을 인정하고 겸손을 배웁니다. 시기와 질투, 무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함께 열심히 하면 모두가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수월성 교육이 단지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켰을 때의 장점에 대한 측면의 관점을 넘어서는 이러한 효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4월, 상산고 정문에는 '전북의 자부심, 상산고를 지켜 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사진=지성배 기자)
지난 4월, 상산고 정문에는 '전북의 자부심, 상산고를 지켜 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사진=지성배 기자)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는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상산고등학교를 가지 않았더라면 서울대 혹은 의치대를 바로 갈 수 있었을 거라고. 저의 자만심 혹은 자부심을 조금 많이 보태면 그랬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상산고등학교에서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치과의사가 되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 길을 후회해 본 적도 없습니다. 상산에서의 3년은 제게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더 넓은 마음을 갖게 하고,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준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뜬금없지만 이 자리를 빌려 상산고등학교를 설립하시고 이렇게 훌륭하게 일구어주신 홍성대 이사장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나이를 먹고 적은 월급이나마 받기 시작해보니, 돈벌이의 규모와 관계없이, 그 쓰임을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는 데에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 깊이 느낍니다.

이사장님께서 자신의 학생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언제나 애쓰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어도 상산인들 만큼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상산의 가르침을 받은 저희가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 사회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지 저희 손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이제 막 사회에서 피어나고 있는 상산의 열매들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그 토양을 훼손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2006년 졸업한 자사고 1기 졸업생들이 상산고등학교의 열매라면, 지금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이제 막 뿌려진 건실한 씨앗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잘 자랄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다녔던 상산고등학교는 좋은 친구들, 좋은 선생님, 좋은 분위기라는 3박자를 갖춘 풍요로운 토양이었습니다. 부디 이 땅을, 이 학교를 지켜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