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믿음은 가장 큰 '선물'

교실이 무너지고 교권이 흔들린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의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교육 현장에 사과나무를 심는 교사들의 이야기. ‘조윤희쌤의 교실 돋보기’를 통해 들여다 본다.

꼭두각시. 꼭두각시는 괴뢰사라 불리는 조종사가 있어야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꼭두각시. 꼭두각시는 괴뢰사라 불리는 조종사가 있어야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타고난 반장?...‘디자인된 삶의 한계’

A는 ‘타고난 반장’이라고 선생님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진중하고 사려가 깊었으며 급우들의 신뢰도 높았다. 선머슴 같은 남자아이들 교실에서 간혹 칠판 당번이 제 일을 해놓지 않으면 조용히 일어나 말없이 칠판을 닦아놓기도 했고, 아이들이 수행평가 등의 숙제를 제 기일 안에 못할까 봐 칠판 귀퉁이에 적어 놓거나 아이들에게 언제까지 무슨 숙제를 내야 한다고 상기시켜주기도 했다. 교실 앞문 뒷문의 홈에 끼인 먼지나 칠판 구석에 묵혀져 쌓인(본교는 아직도 하얀 가루가 날리는 분필을 사용한다.) 분필 가루가 거슬리면 교무실 청소용 진공청소기를 얻어다가 청소를 하곤 했다.

남학생 중에는 가히 희귀종(?)이라 할 만했다. 담임 선생님들은 본인이 칭찬이라도 받는 듯 기분 좋아하셨고, 교과 선생님들도 A가 자신의 반 반장이면 좋겠다고 입을 모으곤 하셨다.

학생회장 선거철이 다가오자 다들 “A가 학생회장으로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교우들 사이에도 평이 나쁘지 않았기에 A 본인도 망설이더니 부모님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있었던지 출마를 결심했다. 그 해엔 A 말고는 다른 후보가 없어 단독출마를 했다.

A의 담임선생님은 A를 위해 ‘출마의 변’을 연습시킬 요량으로 진도가 다 마쳐진 교과시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실전연습을 시켰던 것 같은데 거기서 사달이 났다. 누가 써준 것이 아닌 투박한 정견발표를 들으신 해당교과 선생님께서 한 말씀 하셨던 모양이다.

반장아! 그게 뭐냐! 그게 곧 고3이 할 말이야? 초딩스럽구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평소 말수가 적고 진중한 A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단독후보였던 A는 소견발표를 하고 과반수의 득표만 거치면 회장으로 결정되게 되어 있었다.

학생회장 선거가 있는 날, 방송실에서 카메라를 향해 출마의 변을 읽던 A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자신이 준비한 발표문을 쫘악 찢었다. 카메라를 작동하던 아이도 방송실에 있던 방송반 애들도 교실에서 TV화면을 보던 교사들이나 전교생은 얼어붙은 듯 화면만 주시했다. 그런데 A 역시 종이를 찢고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이었다. 1초, 2초, 5초, 10초. 침묵이 흘렀다. 10여 초의 침묵의 시간이 그렇게 긴 줄은 미처 몰랐다. 여기저기 교실에서 야유 소리가 방송실까지 들렸다. A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송실 밖으로 그냥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해 학생회장선거는 그렇게 무효가 되고, 고3들이 떠나고 난 뒤 신학기 첫 대의원회의에서 간선을 거쳐 새 회장이 선출되었다. 물론 A는 아니었다.

그 A가 고3이 되었고 다행히(!) 필자가 담임을 하게 되었다. 담임이 결정되고 나자 A가 조용히 찾아왔다. 2학년 때도 교과를 맡아 1주일에 4시간이나 수업을 했기에 평소 이야기는 많이 나누고 있던 터였다.

“선생님. 저 신학기엔 아무것도 맡고 싶지 않은데요.

 혹시 아이들이 절 추천해도 제가 사양하려고 하는데 선생님 좀 봐주세요.”

“응, 그래. 편한 대로 하자. 언제든 이야기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렇게 이야기하렴.”

예상대로 아이들은 A를 반장으로 추천했지만 A가 올해는 그냥 평소 부족한 공부만 집중하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완곡하게 부탁을 했고 아이들은 그럭저럭 수용하며 넘어갔다.

덕분에 그해 우리 학급의 반장은 정말 모든 선생님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는 학생이 되었고, 나는 학급경영에 배로 힘이 들었다. 사실 몇 가지의 거름 장치(?)를 가지고 그 학생이 후보로 나왔을 때 반장이 되는 상황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 아이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지켜만 보았었다. 그렇게 그 해는 여러모로 힘든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던 아이의 '돌출행동'

우려했던 일이 하나씩 나타났다. A는 온화하고 내성적인 성격 유형이었지만 적극적인 어머니의 디자인(?)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를 향한 효심과 반듯한 성품 덕에 ‘거역’을 모르고 성장했지만 학생회장 사건은 그 순종적 선택들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그 일을 기점으로 A는 엄청난 자존감의 상실과 자기각성 등 복잡한 혼란을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증세는 우울로 나타났고,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의존을 떨치지도 못하는 묘한 양가감정 사이에서 줄을 타게 되었다.

어떤 날은 아침 조례를 들어갔는데 A가 빠알간 점퍼를 교복 위에 덧입고 있었다. 통상 교복위에는 다른 외투를 입지 않도록 되어 있지만 관례상 감기에 걸리거나 추위를 많이 타면 검은색의 무늬 없는 외투 정도는 묵인하던 터였다. 빨간 점퍼를 입고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담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붉은 빛깔의 점퍼가 다치고 상한 아이의 피 흘리는 심장만 같아 보고도 모른 척했다.

남에게 잔소리 듣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이니 교문을 통과할 때는 알아서 하겠거니 여기면서. 닷새째 되는 날, 드디어 빨간 점퍼를 벗고 교복 상의차림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쳤다.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빨간색이 잘 어울리던데?”

“선생님, 감사합니다.”

필자의 짐작이 맞았었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그렇게라도 내지르고 싶었던 것이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고, 그걸 알기에 참아준 필자가 고마웠던 모양이다. 아이는 그 후로 줄곧 교복만 입었다.

하루는 1교시 수업을 다녀오신 선생님께서 오셔서 A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A가 수업 시간 내내 울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가슴이 쿵 내려앉아 교실로 쫓아갔다. 어디가 아프냐, 불편하냐고 묻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냥 조퇴하겠으니 보내달라는 말만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수업할 수가 없다고.

“A야. 너 집에 가면 어머니가 집에 계실 텐데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니. 엄마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길가를 헤매고 다닐 거냐? 어디 PC방 같은 데라도 돌아다니게? 그러지 말고 오늘 하루만 학교에서 아프자.”

보건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이 학생이 오늘 좀 아프니 보건실에서 하루만 좀 쉬게 해주십사 하고. 아이는 2교시부터 보건실에서 잤다. 몇 날 며칠을 꼬박 새운 사람처럼 정신없이 자고 또 잤다. 8교시 종례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니 아침보다는 훨씬 얼굴이 나아져 있었다.

“앞으로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고 수업시간에 앉아 있기 힘들면 이야기하렴. 방법을 같이 고민해보자.”

A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집으로 갔고, 며칠 후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아이가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모양이고 힘이 좀 든 것 같으니 병원을 데리고 가시는 것이 좋겠다고. 신경정신과를 가는 것이 흠이 되는 시대는 아니니 팔다리가 부러지면 병원 가듯 꼭 데리고 가보시라고. 그렇게 여름방학 중에 병원도 다녀오고 약도 먹으면서 여름을 나름 씩씩하게 견뎌냈다.

“내 길은 내가”...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A’

2학기 수시의 계절이 다가왔다. 평소 수업태도도 바르고 2학년 때 지리올림피아드에서 전국 3등까지 하고, 도시 행정 등에 관심이 있어, 발표도 일관된 주제로 꾸준히 해왔던 터라 그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덧붙여 추천서를 썼다. 부산대학교 지리교육과(당시는 사범대 입결이 매우 높았다.)와 연세대 지리학과를 쓰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산대에 1차 합격이 떴다. 면접만 가면 붙을 상황이었다. 마지막 면접날이 왔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선생님. 저 부산에서 다니고 싶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집에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가면 바로 붙을 상황이었으므로 집에는 면접을 봤으나 떨어진 것으로 하기로하고. 서울의 신촌은 4배수를 뽑는 전형이었지만 아깝게 불합격이 되었다. 정시로 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A를 위해 필자가 먼저 지방에 캠퍼스가 있는 서울 사립대의 입시설명회도 다녀오고 부모님께 한 번 다녀오시길 권해 드렸다. A를 보낼 만한지 최종결정을 하시라고. A의 부모님은 다녀오신 후 기꺼이 보내겠다고 하셨다.

A와는 대학 입학 전에 필자와 한 약속이 있었다. 입학은 지방 캠퍼스에서 하지만 졸업은 서울 본 캠퍼스에서 하자고. 아이는 변함없이 성실하게 대학에 가서도 공부를 하는지 계속 장학금을 받았다.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던 A는 지방 캠퍼스에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학점을 이수하고, 편입시험 준비를 해서 필자와의 약속대로 서울에서 다시 같은 대학을 다녔다. 지금은 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 대학입학 후 첫 여름방학 때 찾아왔는데 보니, 고3 내내 A를 괴롭히던 아토피 피부병이 다 나아있었다. 강원도 물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고 웃고 말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최선을 다하는 아이의 모습 속에 그늘은 말끔히 걷혀 있었다. 힘은 들겠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자신의 시간과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 나가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A는 졸업하면서 필자에게 말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저 졸업 못 했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훈장 같은 한 마디가 가슴에 남았다.

어른의 몫...“아이들을 끊임없이 살피고 기다리는 것”

요즘 학교에서 신입생을 대상으로 정서행동 특성 검사를 해보면 우울함에 이상심리 증후를 보이는 학생들이 절반 가까이 될 때도 있다. 자아존중감도 낮고 우울감에 공격성도 높게 나오는가 하면 학교폭력, 자살 등 위험한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아이들이 꽤 된다. 부모나 교사와 단절된 채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 아이들. 어른들은 끊임없이 그 마음의 문을 두드려도 보고 살피고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

오늘도 또 다른 A가 거리를 헤맬까 싶어 두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살핀다. 이제 곧 종업식을 하고 가르칠 아이들이 바뀌겠지만 세상은 넓고 ‘A’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A’들과의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신학기는 늘 그렇게 설렘으로 다가온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교직생활을 시작한 조윤희 교사는 현재 부산 금성고에서 사회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전국 학력평가 출제위원을 지냈으며 교과서 검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교육부 주관, 제작하는 심화선택교과서 ‘비교문화’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으며 부산시교원연수원, 경남교육청 1정 자격 연수 및 직무연수 강사, KDI 주관 전국 사회과 교사 연수 강사, 언론재단 주관 NIE 강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교직생활을 시작한 조윤희 교사는 현재 부산 금성고에서 사회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전국 학력평가 출제위원을 지냈으며 교과서 검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교육부 주관, 제작하는 심화선택교과서 ‘비교문화’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으며 부산시교원연수원, 경남교육청 1정 자격 연수 및 직무연수 강사, KDI 주관 전국 사회과 교사 연수 강사, 언론재단 주관 NIE 강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