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포스터

[에듀인뉴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Human beings are social animals)’ 

이는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 

실제로 인간은 깨어있는 시간의 약 75%를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상호의존적 관계가 크다. 이는 곧 인간사회는 어느 누구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속에서 상생(win-win)하는 삶을 추구한다. 이른바 성공적인 삶, 행복한 삶은 인간 속에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안타깝게도 점차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다수다.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 보편화라는 틀 속에 똬리를 틀어가는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소위 이런 ‘나홀로족’의 삶은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홀로 삶조차도 해결하지 못하고 가족에 묻혀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사회문제화 되어 가고 있다.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은 이런 부류의 인간을 ‘기생충’ ‘은둔형 외톨이족’이라 부른다. 대한민국은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 사회를 재현하는 것이기에 이는 곧 우리의 미래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우리 사회에 가까이 와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공동체라는 사회 속에서 건전한 상호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부모 또는 가족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멀리서 그 답을 찾기보다 우리의 경우를 봐도 대답이 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선 현재의 젊은이들이 부모세대만큼 잘 살 수 없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고용불안, 청년실업은 이미 그들에게 삶의 범위를 축소시켜 은둔형으로 만들거나 기생하는 부류로 전락시켰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겨우 알바를 하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독립은 언간생심이고 말의 잔치에 불과하다. 

필자의 주변에서 그 사례를 들어본다. 지인의 딸은 대학입학 수능에서 영어영역 만점을 받을 정도로 공부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 어렵다는 ‘인서울’ 대학에 당당히 합격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일본과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각각 1년씩 다녀와 2개 외국어에도 능숙한 편이다. 

이처럼 우수한 지능을 물려받았으나 대학 졸업한 지 7년이 넘어도 취업을 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이따금씩 취업을 시도한다고 하지만 현실의 매정함과 양질의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제는 아예 부모에게 기생하는 삶으로 만족하고 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인재의 낭비고 국력의 손실인가? 그 어렵게 획득한 스팩은 다 어디에 쓸 것인가? 더 큰 문제는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그저 기생충으로 살아가려는 무기력증에 있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그녀의 삶에는 아직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당사자야 그렇게 살고 싶을까마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이런 현상이 점차 보편화 되어 가는 사회적 시스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오스카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 이야기를 현실에 옮겨보자.

한 영화평론가의 말이 실감이 든다. 영화는 ‘기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인간 상호관계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 관계성에는 좋고 나쁨이 공존한다. 

공생은 좋은 의미의 본보기요, 기생은 나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 경우 기생‘충’이 아닌 기생‘인’이 된다. 사람이 살면서 늘 공생과 상생의 꽃길만 걸을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기생‘인’이 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정치인이 국민과 공생만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측면에선 여론에 기생한다. 국회의원이 지역민의 민생을 외면하고 당리당략만 내세우는 건 바로 당에 ‘기생’한다는 증거다. 

노조가 노조원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어떤 세력에 휘둘리면 노조 집행부는 그 세력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리라. 

언론은 어떤가. 팩트에 기생하고 시류에 기생하고 광고 기생충이라는 오명을 듣는 일도 허다하다.

우리는 죽음으로 이 땅을 지킨 수많은 조상에게 빚을 지고 있다. 부끄럽게도 그들에게 ‘기생충’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되돌아볼 일이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br>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