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중국, 가까운 듯하면서 이질감이 드는 곳이다. G2로 미국과 견주고 있는 중국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을 비웃는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 지리상으로 가까워 문화적으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중국. <에듀인뉴스>는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를 통해 중국의 도시에 살아가면서 느낀 문화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현지에서 중국을 접하고 알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인해 중국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과거에 대한 이해와 미래를 예측해보는 작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알다가도 모를 중국!

상하이 도시계획관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상하이 도시계획관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상하이를 한 눈에 보고 싶다면?...상하이 도시계획관을 찾아라


[에듀인뉴스] 상하이박물관이 있

는 인민 공원은 상하이 도심 속에 위치하고 있어 상하이 시민들뿐만 아니라 여행객들의 쉼터가 되는 곳이다.

미술관을 보기 위하여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는데, 호주 여행 갔을 때 보았던 가든처럼 빼곡하게 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규모가 매우 크고 넓다.

그 푸르름 속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의 담배 연기에 아쉽긴 했지만 도심 속 이런 큰 공간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중국이 부럽기도 했다.

공원에서 더위를 잠시 피한 뒤 바로 옆에 있는 상하이 도시계획관으로 갔다. 2000년에 세워지 상하이 도시계획관은 지하 2층, 지상 5층 규모의 건물로 모양이 정말 특이하다. 3층에는 상하이 도시모형이 만들어져 있는데 세계 최대 도시계획 미니어처라 한다.

바로 앞 대로변은 차도를 줄이고 보도 블럭을 설치하여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로 조성하고 있었다.

상하이 도시계획관은 건축물 관련 최고상인 ‘루반 상’을 수상한 건물이다. 특히 건물 윗부분 모양은 상하이의 상징 꽃인 백옥란이 활짝 핀 모습이다.

입장 티켓을 구입하고 짐을 엑스레이 투시기에 넣은 후 도시계획관 내부로 들어갔다.

로비 한쪽에 동방명주 타워를 포함한 상하이의 상징인 ‘푸동지구’의 고층빌딩 모형이 보이는데,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금색으로 표현을 하였다.

와이탄의 옛 사진.(사진=김현진 교사)
와이탄의 옛 사진.(사진=김현진 교사)

또 한쪽에는 황푸강을 따라 만들어진 옛 조계지역 ‘와이탄’의 모습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2층으로 올라오니 1층 로비가 한눈에 보이고 상하이의 옛 모습을 사진, 자료, 영상물 등으로 볼 수 있었다.

상하이시의 미니어처 모현.(사진=김현진 교사)
상하이시의 미니어처 모현.(사진=김현진 교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에 도착하면 상하이 시를 미니어처로 나타냈는데 그 규모가 엄청 크다. 내가 살던 인천 송도신도시에 있는 홍보관 컴팩스마트 시티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미니어처는 상하이 도시의 전체 모형이며 건물 하나하나가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미니어처 옆쪽으로 관람로가 만들어져 있어 대륙의 커다란 스케일이 느껴진다.

미니어처 및 주변의 다양한 사진과 영상을 보며 우리가 갔던 여행지의 모습과 방문하게 될 다른 장소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미니어처 모형 옆쪽으로는 파노라마 화면이 있어 상하이의 여러 장소를 살펴볼 수 있다.

4층에는 쑤저우(소주)와 항저우(항주)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살기 좋은 도시로 쑤저우와 항저우를 뽑는다.

마음 같아서는 더 여유를 갖고 방문하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자료들만 살펴본다.

도시계획관 5층에는 카페가 있고, 전망대처럼 통유리로 연결되어 있어 주변 도시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도시 계획관에서 보았던 홍커우 공원 옆에는 축구 경기장이 있는 듯하다. 중국인들도 우리 못지 않게 축구를 꽤 좋아한다.

이곳은 상하이에 있는 프로축구 구단인 ‘상하이 선화’의 홈구장이다. 한국의 최강희 감독과 김신욱 선수가 활약하는 축구팀인데 요즘 김신욱 선수의 활약이 대단하다. 스마트폰으로 급하게 찾아봤더니 오늘 홈경기가 있는 날이다.

와이프와 이야기를 하며 축구 관람을 제안했지만 별로 표정이 좋지 않다. 가족과 함께 온 여행이기에 내 욕심은 조금은 버려야 할 것 같다. 국제도시 상하이를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아쉽다.

아들이 어제 먹었던 한국식 갈비집에 다시 방문하기를 원해서 난징동루로 다시 이동하였다. 난징동루와 와이탄의 야경은 보고 또 보아도 웅장하고 멋지다.

루쉰 기념관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루쉰 기념관 입구.(사진=김현진 교사)

윤봉길 의사를 찾아 루쉰공원으로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날 다롄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조금은 여유를 부렸다.

한국에 있을 때 중국은 황사 때문에 항상 하늘이 뿌열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행 온 첫날부터 상하이 날씨는 맑고 하늘은 파랗기만 하다. 와이탄에서 찍었던 가족사진은 평생 기억에 남을 사진이다.

호텔 프런트에 짐을 맡기고 지하철을 환승해 홍커우 공원으고 갔다. 과거에는 훙커우 공원(虹口公园)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루쉰공원(鲁迅公园)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상하이의 중심부에 비해 화려함은 떨어진다. 어제 오고 싶었던 홍커우 축구 경기장이 눈앞에 보인다. 워낙 축구를 좋아하기에 가슴이 설레인다.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설레임을 알 것이다.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공원 입구를 찾아갔다. 생각보다 한산하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현장이지만, 이곳 현지인들에게는 동네사람들의 휴식 장소이다.

루쉰공원은 1896년 상하이 공동조계 관청이 있었던 장소이며 조계의 밖에 있던 농지를 취득하여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훙커우 오락장이라 불렸고, 영국 원예가에 의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서양식 정원양식을 가지고 있다.

1922년에 훙커우 공원으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에는 중일전쟁으로 일본군에 의해 공원 내 건물들은 파괴되었고, 1942년에는 일본군의 군사용지로 사용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철수한 1945년에는 장제스에 의해 중정공원으로 개칭되었지만, 1950년 다시 옛 이름을 찾아 훙커우공원으로 불렀다.

이후 루쉰 선생의 75주년을 기념하면서 1956년 루쉰의 묘를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1988년에 루쉰공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루쉰(1881~1936)은 중국 저장성 출신으로 소설가였으며 인민사상가로도 유명한데,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다. 대표작으로는 아큐정전(阿Q正傳)과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이 있다.

루쉰 기념고나 내 루쉰상.(사진=김현진 교사)
루쉰 기념고나 내 루쉰상.(사진=김현진 교사)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정면 쪽에 루쉰의 동상이 있고 루쉰기념관이 있다. 루쉰기념관은 무료이며 1층에는 행사장이 있어 문학행사를 주최하는 공간과 루쉰이 작업했던 방들을 재현해 놓았다. 2층에는 루쉰의 작품과 루쉰이 살던 시대의 모습들이 나타나 있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문학가와 관련된 자료들을 잘 보존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루쉰공원에 온 진짜 목적은 윤봉길 의사의 매원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아들에게 윤봉길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해준다.

루쉰 공원 내 윤봉길 의사 기념관.(사진=김현진 교사)
루쉰 공원 내 윤봉길 의사 기념관.(사진=김현진 교사)

루쉰 기념관에서 나오니 방향을 가리키는 팻말에 윤봉길 기념관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공원을 산책하듯 매원을 찾아 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 총리)인 김구 선생님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협의 끝에 윤봉길이 도시락과 물병으로 꾸며진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당시 국민당 총통인 장제스는 “중국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격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였다.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린 사건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피신을 하게 되었으며, 1945년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 중국 남부지역을 떠도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윤봉길 기념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루쉰 공원은 입장료가 무료이지만 기념관은 티켓을 구입하고 들어가야 한다.

매헌 기념관.(사진=김현진 교사)
매헌 기념관.(사진=김현진 교사)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윤봉길의사의 기념관인 매정(梅亭). 윤봉길 의사의호인 매헌(梅軒)과 정자의 정을 딴 이름으로 약 20여 평의 정자 형태 2층 목조 건축물이다.

1994년 루쉰공원 내에 정자 매정을 건립, 2003년 12월에 매헌 기념관을 개관하였으나 루쉰공원 전체 개보수 공사에 따라 2013년 9월부터 휴관, 제83주년윤봉길 의사 의거일에 맞춰 2015년 재개관을 하게 되었다.

기념관 외부에는 윤봉길 의사의 전언과 출생 및 국내활동, 그리고 조국 광복 등의 내용이 입간판으로 되어 있다.

기념관 1층에 들어가면 정면에 흉상을 비롯해 의거의 성과 및 영향, 조국의 광복 등에 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의거 당일 아침 한인애국단장 김구의 시계와 맞바꾼 윤의사의 시계...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위해 출발하기 전 김구 선생에게 “저는 앞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라며 김구 선생의 시계와 맞바꾸었다고 하는 이야기. 임시정부에서도 느꼈지만 이들의 삶이 안타깝기만 하다.

의거로 인해 총사령관 사라카와와 상하이 일본 거주민 대표였던 가와바타 등이 죽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중국 주재 일본 영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 안내판.(사진=김현진 교사)
윤봉길 의사 안내판.(사진=김현진 교사)

2층은 영상물 상영 및 교육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영상을 다시 보고 있는데 한국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역사 체험을 온 듯하다. 우리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찾아온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윤봉길 의사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봉길 의사, 25세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젊음이 자꾸 아쉽기만 하다.

윤봉길 기념관에서 나오는데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고 한 할아버지가 바닥을 가리키신다.

한글을 붓으로 쓰는 중국 할아버지.(사진=김현진 교사)
한글을 붓으로 쓰는 중국 할아버지.(사진=김현진 교사)

‘오른쪽으로 300m 가면 지하철역이 나온다’라고 커다란 붓을 이용해 한글로 써주시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봤던 분인데 실제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최강희 감독과 김신욱 선수의 모습이 그려지는 홍커우 축구장 옆을 돌아서 지하철 역으로 향하였다.

아이 러브 상하이!.(사진=김현진 교사)
아이 러브 상하이!.(사진=김현진 교사)

몇 번을 가도 또 가고 싶은 상하이


현재의 화려함과 과거의 전통미가 공존하는 국제도시 상하이를 보면 한국 여행객들에게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여행 블로그들을 보면 몇 번을 가도 또 가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비단 한국 사람 뿐 아니라 세계 여행객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와이탄의 화려함도 있지만 열강의 침략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도시를 보면 우리 나라가 생각난다.

파란 하늘과 함께 멀리 보이는 동방명주를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 태극기가 붙어 있는 모자를 쓰고 임시정부를 방문했던 일들, 주가각에서 본 전통 수향 마을, 여유가 느껴지는 고즈넉한 신천지, 밝은 조명으로 빛나는 난징동루와 와이탄...

무더위와 짧은 일정으로 상하이의 일부만 훑어보고 가는 거 같아 아쉬움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가족들과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지하철과 마그레브를 타고 푸동공항으로 갔다. 푸동공항의 국내선 출국장도 굉장히 크다. 기내에 갖고 타려던 캐리어 때문에 공항에 있는 공안이 브레이크를 건다. 안에 있던 로션 때문에 짐을 화물편으로 보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용률이 높은 공항이라 그런가? 중국에서는 그때 그때 다르다는 말이 이런 경우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지 못했다. 공항에 아들이 좋아하는 던킨도너츠 매장이 있다. 도너츠를 몇 개 사서 다롄으로 돌아 가는 비행기에 올라 탔다.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
김현진 중국 대련한국국제학교 교사